20시, 논커플링, 계생님
@geseng_
“하.”
조소가 섞인 탄성을 뱉었다. 따닥따닥 타들어가는 장작 소리가 밤과 어우러져 퍽 다정했다. 불꽃에 따라 흔들리는 붉은 사내의 검은 그림자가 요란하고 시끌벅적하다. 음영이 드리운 얼굴 속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케일 헤니투스. 구국의 영웅이자 로운의 빛나는 별. 그는 지금 홀로 담요를 덮고 앉아 잔뜩 찌그러진 종이 한 장을 들고서 피곤한 새벽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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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수 요원. 야. 신입. 어이, 검 쓰는 놈. 칼잡이. 판타지만 읽는 새끼. 그런 호칭 속에서 유일하게 내 이름 석 자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들. 우리 팀원, 선배, 그리고 팀장 이수혁과 동기 김록수. 그게 내 새로운 가족이었다.
술 한 모금이 고플 때가 있다. 거품과 동그란 탄산 방울들이 사정없이 치고 올라오는 누런 맥주도 침이 고였으나 그것보다 다른 것이 당길 때가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병에 이딴 색을 입혔나 싶은 촌스러운 초록색 병은 이미 냉장고와 바깥의 온도차로 인한 물기가 범벅이다. 손이 버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점원이 가져다주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집어들고, 괜히 한 번 흔들어도 주고 병목도 쳐주며 온갖 소란이란 소란은 다 떤 다음 적당히 하라는 동기의 잔에 투명한 그것을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고 싶은 날이 있다.
짠 하자. 우리 록수의 웃는 얼굴을 위하여!
정수야. 말이 되는 건배사를 해라.
제 얼굴이 뭐가 어때서요.
세 개의 작은 잔이 공중에서 부딪히고 목을 뒤로 꺾는다. 저마다 마시는 모습이야 다르지만 꿀떡이는 목울대들은 하나같이 똑같다. 지독한 화학 약품 냄새와 함께 혀뿌리를 자극하는 달콤한 맛이 났다. 쫀쫀하게 입안이 조이는 기분이 들면 또 참을 수 없이 분위기에 취해 한 잔 더, 그리고 또 한 잔 더. 록수야 나 한 잔만 더. 너도 마셔라. 팀장, 지금 밑잔 깐 겁니까? 진짜 형 실망이야. 그런 소리나 좀 더 하다가 술이 술을 불러 더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티게 된다. 안주나 좀 먹으라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팀장이 파전을 쏙 집어 입에 넣어줄지도 모르지. 그럼 세상에서 내가 또 가장 사랑하는 우리 김록수도 간장이나 찍어서 먹으라며 간장을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 아니. 그건 싫긴 한데. 그래도 내가 오만상 찡그리는 것을 보고 작게나마 웃을 꼴을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또 김록수 웃는 꼴이 좋아서 넘어가줄 생각이 있다. 입에 남은 간장의 찝찌름함이 고약하면 또 술 한 모금으로 입을 씻고, 알코올 잔향만 남게 돼서 간장 같은 건 잊어버리고 다른 먹을 건 없냐며 입을 아아 벌리게 되는 의미 없고 바보 같은 루프를 도는 거다.
결국엔 다들 알딸딸해진 기분으로 셋 중 아무의 집이나 들어가서 펭귄이라도 된 마냥 서로 안고 깔고 뒤척이며 자버리는 게 마지막 순서다. 내 다리가 누구의 몸에 올라갔는지도 모르고 내 옆구리를 걷어차는 이 발가락이 누구 발가락인지도 모르고, 이불 뺏어가는 누군가의 손등을 이로 깨물면서 내 몫을 사수하고. 숙면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아무도 달아나는 법이 없는 잠을 잤다. 우리는 항상 그게 당연한 것처럼 그랬다. 떨어지면 죽는 사람들처럼.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술이 너무 고파서 모처럼 일찍 퇴근하려는 김록수와 팀장을 붙잡아놓고 이런 날이 어디있냐며 한 잔만, 한 잔만 하고 매달렸던 날. 잠이나 자겠다는 록수는 삼겹살로 꼬셨고 잔업이 남았다던 팀장은 애교로 꼬셨다. 잔뜩 달궈진 불판 위에 잘 익은 신김치와 쫑쫑 썬 마늘, 동그란 양파를 차례차례 올리고 윤기나는 생삼겹살을 빈틈 없게 올렸다. 핏물이 고기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면 속으로 천천히 30초정도를 더 센 뒤 뒤집었다. 치이익, 치이... 듣기에도 좋은 소리가 울릴 동안 더 듣기 좋은 목소리들이 목적지를 두고 공중을 넘나든다.
"팀장, 밑반찬 그만 먹고 조금 있다 고기 먹지 그럽니까."
"이것도 먹고 고기도 먹을 건데?“
김록수의 핀잔에 팀장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웬일로 신경을 다 써주냐. 그렇게 적힌 얼굴을 보더니 김록수는 오만상을 다 찌푸린다.
"위장 커서 좋겠네요."
"잘 먹어야 힘이 나지. 안 그러냐, 정수야?"
"당연하죠. 어, 록수야. 저 거기 가위 좀."
"칼로 잘라. 칼로.“
"내 검이 식칼인줄 알아?"
"휘두르는 꼴 보니 비슷하던데."
"와, 진짜 너무한다! 팀장, 혼내줘요!"
"어, 정수야. 칼로 잘라."
"아! 팀장까지!“
이 세상에 내 편이 없다. 내 편들만 불러놨는데 왜 내 편이 없지? 세상이 이렇게 억울하다. 억울해.
빨간 가위를 든 뒤 설컹설컹 고기를 자르고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조금 더 구웠다. 지글지글한 기름이 옷에도 튀고 물잔 위에도 튀어 쇳색이 보이는 투명한 물 위로 동그라미들이 떴다. 별로 마시고 싶게 생기진 않았던 모양인지 팀장은 물잔을 수저통 뒤로 밀어놓았고 김록수는 냅킨을 올렸다. 잘 익은 것을 각자의 앞으로 밀어주자 젓가락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수야, 아.“
나도 한 점 먹어볼까, 하고 생각한 사이 이미 눈앞에 초록색 두툼한 쌈이 가득 들어왔다. 쌈의 끝을 따라가보자 팀장이 서글서글하게도 웃는다. 냉큼 입을 벌려 받아먹자 방금 구워 따끈따끈한 고기가 짭찔한 쌈장과 매콤한 고추 한 조각 정도, 그리고 야무지게 넣은 마늘까지 함께 어우러져 씹혔다. 진짜 맛있다. 소주가 저절로 생각날 정도로.
”자, 짠해. 짠.“
소주병을 눈으로 찾기가 무섭게 이미 언제 따라놨는지 찰랑찰랑 잘도 채워둔 잔이 손에 쥐어졌다. 건배사 하나 없이 대충 잔을 부딪히며 먼저 쭉 술을 들이켜버리는 모습이 매정해보이기도 했지만, 저 무심한 얼굴에 속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나는 아니지. 그냥 이건 나를 아는 거다. 우리를 알고 있는 거고. 팀장이 자기 입에 고기를 넣기보단 지금까지 집게를 쥐던 나에게 먼저 쌈 하나를 줄 거라는걸. 고기를 맛 본 내가 술을 고파할 거라는 걸, 김록수는 그 숱한 기록으로 알고 있다. 아니, 사실 저 새끼를 내가 또 아는데.
”하여간 속 다른 새끼.“
기록 같은 능력이 없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나는 내 동기가 덤덤하고 무심한 얼굴로 누구보다도 주위 사람부터 챙기는 걸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 중 하나다. 새까만 머리통이 새까맣지 않다는 것도. 사실은 그 검정이 누구든 다 안고 가는 색이라는 것까지. 그 증거가 온몸에 두르고서 꾸역꾸역 숨기는 흉터에 있다. 자기만 지켰다면 없었을 것들이다. 마음을 몰랐다면 드러냈을테고.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다면 가지지 않았을, 김록수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팀장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팀장 이수혁은, 진짜 너무 좋은 사람이니까. 누가 봐도 가장 멋있는 사람이고 존경스러운 선배이자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 참기름장에 삼겹살을 찍어먹는 아저씨긴 하지만. 아저씨 탄 거 먹지 마세요.
한 잔, 두 잔. 술이 넘어간다. 또 세 잔이 넘어가고 네 잔은 더 빠르게 넘어갔다. 잔에서 병으로 넘어가고, 한 병. 두 병. 창백했던 얼굴들이 붉게 달아올라 약간은 풀린 상태의 세 병과 자세가 무너지고 편하게 입을 놀리기 시작하는 네 병.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먹었다. 정말로 내일이 없을 수도 있잖아. 오늘은 술을 넘겨도 내일은 못 넘길 수도 있잖아. 칠흑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난 굵은 가르마가 섹시한 우리 팀장도 약간 찌푸린 미간 아래 곧게 솟은 코가 잘생긴 우리 록수도. 어, 그러고 보니 진짜 잘생겼다. 너 이새끼들 우리 고향 데려가면 어? 우리 엄마랑 아빠랑. 또 그 누구냐, 우리 할아버지랑.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가족이라던 그 사람들이랑 얼마나 예뻐하겠어. 착하고 사람도 좋은데 잘생기기까지 해서. 역시 끼리끼리 논다고 칭찬해줄 걸... 내가 그럼 또 자랑해야지. 우리 팀장은 머리도 새끈한데 검도 잘 써요. 김록수 이 새끼는 좀 멍청해서 그렇지 똑똑해요. 얘네랑 같이 집 지키고 있으면 사과도 열리고 포도도 열리고 가족들도 다 다시 모일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사실은 이 사람들이 내 새 가족들이에요. 내 가족들. 내 너무너무 보고싶은 가족들. 아. 술잔 떨어뜨렸다. 뭐야, 술이 새나? 왜 자꾸 잔이 비어. 이게 다 무뚝뚝한 동생을 둔 내 죄가 커서 이렇다.
떨어진 잔을 주우려 정신을 차려보니 목이 옆으로 꺾여있다. 원래대로 각도를 복귀시키자 팀장 어깨에 기대서 입에 젓가락을 물고 의미 없이 징걸거리는 김록수가 보였다. 얼굴 벌건 것을 보니 너도 과음했구만. 속으로 피식 웃는다는게 나도 모르게 겉으로 새어나와 큭큭 소리내어 웃었다. 팀장은 아직 멀쩡해보이긴 하지만 술기운은 적당히 오른 모양인지 집게로 남은 고기를 정리하다 불판을 퉁퉁 두드리고 있었다. 이와중에 손놀림이 얼마나 화려한지. 술기운을 좀 눌러볼 생각으로 기본찬으로 나온 나물을 먹다가 문득 생각이 나 가볍게 입을 열었다.
”팀장. 저 화분 샀다.“
”또 죽이게?“
”아니. 이번엔 그래서 선인장으로 샀는데요.“
”그건 잘했네. 매번 말려죽였잖아.“
화분 샀다는 말에 팀장이 한 방, 이어서 김록수가 또 한 방이다. 두 대 맞은 김에 소주도 두 잔 박았다. 그새 김록수는 점원을 불러 삼겹살을 더 주문하고 야무지게 밥과 된장찌개까지 시켰다. 메뉴판을 탁 소리 나게 접은 뒤 나를 보는 내 귀여운, 아니. 귀엽지는 않나? 아냐. 귀여워. 이모저모로 잘 뜯어보면 참 귀여운 김록수를 보며 히죽 웃고서 대답했다.
”집을 못 들어가는데 뭐 도리 있습니까, 동기님.“
”...빌어처먹을 인생.“
그리곤 소주를 퍽 마신다. 좀 꺾어먹지, 새끼.
”야 왜, 난 그래도 팀장이랑 너랑 지내서 좋은데.“
”별 게 다 좋다.“
”김록수는 그렇다치고 팀장도 별로예요?“
”글쎄다.“
“뭐야. 나만 좋아해. 짝사랑이야 뭐야.”
“그걸 이제야 알았냐. 그치, 록수야?”
“그러게요. 얼빵한 새끼.”
“...둘 다 오늘 내 집에선 안 재워줘.”
“내가 우리 정수 참 좋아하지.”
“우리팀 최고죠.”
팀장도 김록수도 갑자기 입발린 소리를 하며 내 앞으로 공깃밥 한 그릇을 밀어주고 방금 구워 기름이 반지르르한 삼겹살 한 조각을 뜨끈한 밥 위에 올려줬다. 내 집이 제일 편하다 이건가. 속이 뻔히 보이는 짓이라지만 그게 또 괜시리 좋아서 금세 삐죽거렸던 얼굴을 풀고 헤실헤실 웃었다. 내 딴에는 예쁘게 웃은 건데 김록수는 또 얼빵하게 웃는다며 핀잔을 준다. 얌전히 밥에 된장찌개를 얹어 말고, 남은 고기랑 또 우물우물 먹으면서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술병이 쌓여갈수록 허튼 소리도 해보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도 해보고, 가끔은 마음에 너무 있었던 소리를 술기운을 빌려 하기도 하고. 토할치만큼 배가 불러 더 이상 술도 밥도 안 들어갈 때쯤 기지개를 쭉 펴며 고깃집을 나왔다. 2차, 3차를 가기엔 빌어먹을 출근이 내일 우리를 또 기다리고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좁은 거실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사용감이 있는 매트리스는 그간 우리의 행적을 보여주듯 푹 눌러 꺼진 부분도 있고 뭔지 모를 얼룩들이 져있었다. 두 개를 나란히 놓자 다 큰 어른 셋 정돈 구겨 넣으면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넉넉한 잠자리가 되었다. 베개도 세 개. 이불은 두 개. 다들 여벌 잠옷은 알아서들 잘 꺼내 입고 칫솔도 제 집인양 꺼내서 양치하고 있다. 각자 집에 있는 잠옷이야 다르지만 우리 집은 하늘하늘한 재질의 평범한 바지와 티셔츠다. 색은 차례대로 검은색, 회색, 흰색. 그리고 당연한 듯이 김록수가 검정을 가져갔다. 회색을 가져가려는 팀장 손등을 찰싹 치고 ‘내 집이니 내가 입을 겁니다’라며 고집을 피워 팀장 품엔 흰색 잠옷을 안겨줬다. 그 결과가 지금 이거지. 새하얀 잠옷을 입고 하얀 양치 거품을 뱉는 이수혁씨. 뿌듯하다.
“왜 또 내가 중간이야.”
팀장을 중간에 끼우고 양옆을 나와 김록수가 차지했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팀장이 몸을 뒤로 눕히기 무섭게 나는 왼쪽 다리를, 김록수는 오른쪽 다리를 올렸다. 신체계의 탄탄한 다리 하나와 정신계의 튼튼한 다리 하나가 제 배와 골반을 누르는 게 영 답답한지 아주 얼굴을 주름종이처럼 찌그러뜨렸다. 팀장을 사이에 두고 김록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히죽 눈을 얇게 접어 웃었다. 김록수는 눈으론 웃지 않았지만 장난기가 도는 해사한 웃음을 짓는 걸 봐선 얘도 나랑 똑같다.
텁. 터업. 네 개의 팔이 한 사람에게 감겼다.
“...나무늘보냐?”
“네에.”
“네.”
“하이고. 난 너희들 이렇게 가르친 적 없다.“
“팀장도 저번에 김록수 깔고 잤잖아요. 저저번에는 나도 뭉개졌는데.”
“시끄러. 입 다물고 자.”
또다시 수다가 시작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김록수가 피곤한 목소리로 썩둑 잘랐다. 동기 말 들어줄 생각 없는 나는 팀장과 소소한 수다를 좀 더 떨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팀장을 중심으로 두 명이 들러붙어서 이불도 엉키고 발로도 차고 매트리스 밖으로 머리가 나가서 차가운 감각에 잠깐 깼다가 다시 뜨뜻한 팀장 품에 파고 들었다. 사실 팀장 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잠깐 일어나보니 김록수였다. 오히려 팀장 머리가 내 배에 있더라. 색색 자는 팀장 눈가의 얇은 주름이 편하게 풀려있었다. 김록수의 헐렁한 잠옷 안으로 짙은 흉터가 살짝씩 보였다. 하여간 다들 잠버릇은 고약해서. 잠복 때는 숨도 안 쉬는 것처럼 얌전히 자는 주제에. 술의 탓일지, 다른 것일지. 탓을 둔 건지 덕을 본 건지 굳이 구분하지는 않았다. 구분하기엔 너무 깊이 들어가야 했으니까. 우리는 그걸 캐내지는 않았으니까.
매일 일에 치이고 다치고 뼈도 부러지는 삶이다. 휴가도 받지 못하고 위험도에 비해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도 아니다.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를 일을 하고 있고, 월급도 넉넉하지 못하다. 기껏 간만에 술자리를 가져도 끝까지 가지 못할 만큼의 여유다. 제대로 침대에 누워 자기보다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자는 일이 더 많고, 수면시간이 6시간을 넘길 때는 기절했다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는 몇 번 수혈 받았는지 횟수도 잊어버렸다. 괴수가 아닌 인간에게 자존심과 몸뚱아리 모두 걷어 차인 적도 있다. 간단한 영양바나 간편식으로 식사를 대체할 때도 많았다. 김록수는 기껏 먹은 것도 능력을 쓰다 몸에 열이 너무 올라 다 게워낸 적도 몇 번씩이나 있었다. 팀장은 위치에 걸맞게 더 지독하면 더 지독한 삶을 살았지. 스무 살이 되기 전의 나에게 지금 내 삶을 보여준다면 저 멀리 도망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이대로만 있으면 좋겠어.’
팀장과 농장도 짓고 싶고 내 과수원도 차리고 싶다. 김록수가 또 제 몸 망치기 전에 끌고와서 햇과일이나 먹이며 살고 싶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했던 미래가 완전히 뒤집어진 경험을 했어. 그러니 기대를 하기가 어려운 거야. 기대를 하기가. 기대라는 게.......
...그럼에도 나는 기대를 하겠지만.
차가운 새벽의 소리가 고요함에게 잡아먹혔다. 멍해질정도로 적막한 공간 속에서, 나는 유일하게 온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파고 들었다. 아. 따뜻하다. 김록수도, 이수혁도. 내 사랑하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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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고급진 벽난로에서 로잘린의 머리색을 닮은 불꽃이 온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그 앞에 놓인 녹색 흔들의자에 앉아 제 손에 쥐어진 작은 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하는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마.]
지금껏 몇 번이나 헛소리를 들어온 탓에 구깃구깃한 자국이 한껏 남은 쪽지 위로 정갈한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선택을 해야만 할 거라느니, 죽었어야만 했다느니, 선물이랍시고 기억을 넘겼더라니. 이상한 소리만 연신 해대던 쪽지에 처음으로 케일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 만한 말이 적혔다.
처음엔 필요 없으니 됐다고 거절을 하려다가, 아니. 내가 왜 거절을 해야돼? 주는 놈이 얄밉다고 준다는 걸 안 받을 이유 있나? 이렇게 이어진 생각에 벅벅 구기던 종이를 다시 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빌어먹을 죽음의 신은 케일더러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적어도 하룻밤 꿈정도는 네가 원하는 것을 꾸게 해주겠다고 말한 거다. 현실을 바꾸진 못해도 네 기분 좋은 꿈자리 한 번정도는 주겠다고. 매번 무작위적으로 꾸게 하던 그런 거 말고, 네가 딱 원하던 시점의 원하는 걸 보여주겠다고.
케일은 고기나 실컷 먹던 꿈을 꾸게 해달라고 할까, 하얀별 뒤통수를 때리던 날을 꾸게 해달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알베르가 황금패를 주던 날을 선택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저 예전의, 아주 예전의. 그러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의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그들의 얼굴이 더 정확하게 떠오르기 전에 눈을 감았다. 차라리 김록수일 적 꿈을 꾼다면.......
케일 헤니투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쪽지를 만질거리다 입을 열었다.
“들어간다는 거지.”
맨날 그냥 복기하는 거 말고. 기록을 따라가는 사람 말고.
“...그러면.”
케일의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였다. 종이 위로 속삭임이 얹어졌다. 죽음의 신 제대로 듣고 있냐고. 나 분명히 소원 빌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잘 해. 다 엎어버리기 전에.
케일은, 김록수는 입속으로 중얼거리곤 이내 흔들의자에 길게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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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록수는 감았던 눈을 떴고, 시야가 밝아졌다. 눈보다도 귀가 먼저 반응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시끌시끌하다.
“와, 지금 이제 8시야, 와씨. 내가 8시에 퇴근을 한다.”
“그렇게 좋냐, 정수야.”
“아 형. 당연하죠. 내일 출근까지 10시간이나 남았잖아요.”
눈에 들어온 것은 그날의 최정수다. 아주 신이 많이 난 최정수. 그리고 그 옆에서 웃음을 피식 흘리고 있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그날의 이수혁이다. 그리고 이 날의 김록수는 분명 퇴근하기가 무섭게 잠이나 자야겠다고 도망치다가 덥썩 붙잡혔다. 김록수는 흉터가 잔뜩 새겨진 제 손을 한 번 쥐었다 펴고, 유리창에 비춰진 제 모습을 몇 초정도 말없이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걸어갔다.
“하긴. 오랜만에 저녁이 있긴 하네.”
마찬가지로 평소보다 가벼운 목소리의 이수혁이 들렸다. 기억과 기록은 달라서, 기억하는 것은 분명히 과거지만 기록은 당장 내가 겪고 있는 현재와 혼동될만큼 선명해서, 그래서 김록수는 이수혁의 목소리를 잊은 적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과거는 다르기 때문에 그는 잠깐 목울대를 울렁였다. 평소와 다르게 이번엔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꿈이 아닌 현재를 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죠? 야씨, 오늘 인간적으로 삼겹살 한 판 때려요!”
“난 잔업 남았는데?”
“아 팀장. 아아아. 이잉.”
“떨어져.”
“티임장.”
“하이고.”
최정수는 되도 않는 애교를 떨며 팀장 팔에 덥썩 매달린 채 우는 소리를 냈다. 팀장은 한숨을 쉬면서도 못 이긴 척 최정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김록수, 형 기다렸지!”
“뭐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좋다고 실실 웃는다. 네가 아직 집에 안 갔다는 자체가 지금 우리랑 있고 싶어서 안 간 거 다 안다고. 너 일주일 밤 샌 건 아느냐고, 평소 같으면 너도 집에 냉큼 갔겠지! 우다다다 쏟아지는 추측이 어떻게 저렇게 정확한지. 김록수는 입꼬리를 올려 옅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었다. 이 모든 기분이.
“고기.”
김록수는 그날을 만들기 위해 한 마디를 뱉었고, 최정수는 냉큼 ‘삼겹살!’하고 외쳤다. 그 이후는 비슷했다. 팀장이 자주 가는 고깃집으로 다 함께 발을 옮겼고, 대기 손님이 있어 짧은 수다를 떨며 시간의 사치를 즐겼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삼겹살 5인분을 시켰고 차가운 소주를 주문했다. 돼지 기름을 바른 불판에 익숙하게 바알간 고기를 올리고 굽는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잘 익은 새콤한 김치를 올리자 지글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에 침이 고이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자극이 침샘을 후렸다.
“팀장.”
파채 좀 더 달라고 할까요. 기본찬으로 나온 파채를 염소처럼 집어먹는 팀장을 보며 그렇게 말하려 했다. 뭐든 좋으니 뭐라도 좀 더 먹으라고 하려고 하려다가.
“왜?”
“...고기 나올건데 적당히 드시지.”
“고기도 먹을 건데? 너 신체계 위장 우습게 보냐.”
“그놈의 신체계는 그러다 접시도 먹겠습니다.”
“정수는 먹을지도 몰라.”
“아 형.”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약간은 달라진 대화였지만 그래도 흐름은 얼추 같았다. 가위 좀 달라는 최정수에게 칼이나 쓰라는 장난을 치고, 팀장이 그 장난을 받아준다. 고기를 다 구운 정수가 집게를 정리하기가 무섭게 이미 다 큰 어른 주먹만한 쌈부터 싼 팀장이 정수의 볼을 가득 채웠다. 한 입 한 입 씹을 때마다 야무지게 움직이는 턱이 부지런하다. 김록수는 말없이 소주 뚜껑을 까르륵 까서 정수 앞에 놓인 작은 잔에 넘치도록 부었다.
“짠.”
그리고 멋대로 제 몫의 잔도 채워 먼저 술을 넘겨버리자 뭐가 또 그리 좋은지 얼빵하게 헤프게 웃으면서 잔을 넘겼다. 그 모습을 보던 팀장이 자기 잔을 내밀고, 목을 꺾어 단숨에 비워낸다. 부지런히 젓가락이 오가고 술잔도 오갔다. 그리고 이어졌던 무의미한 대화들.
저번에 그 괴수한테 나온 부속물로 무기 하나 만든다는데요. 검이래? 아뇨. 젠장, 검이면 내가 가져올 걸. 정수야, 어차피 너는 짬이 안 돼서 못 가져온다. 팀장이 가져와줄 거 아니었어요? ...록수야. 누가 쌈에 고기를 한 번에 네 개를 싸서 처먹어. 누가 굶기던? 어떤 새끼야, 말해봐. 형이 혼내줄게. 뭐라고? 팀장이 고기를 안 사주더라고? 형, 어떻게 우리 록수한테 고기를 안 사줘요. ...네? 우리들이 지금까지 먹은 고기로 한라산을 쌓아요? 록수야, 계산해봐. 저 말이 사실이냐? ...너 오늘따라 김치 잘 먹는다. 맛있냐? 네. 맛있네요.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동기야. 우리 오늘 점심 김치찌개였다. ...어쩌라고......
화분을 샀다고 자랑하는 최정수는 이미 완전히 취해서 손끝까지 다 벌겋게 익어있었다. 옆을 보니 팀장도 은근히 귀끝이 붉은 게 취기가 분명히 올랐다. 김록수는 케일 헤니투스가 과연 주량은 쓸만하다는 생각을 하며 소주를 또 한 모금 넘겼다. 눈앞이 흔들렸다. 나도 취했다.
분명하게 취했다. 김록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잠옷을 입고 입에는 칫솔이 물려 억지로 양치 당하고 있었다.
“이아, 에하 애호 아이호.”
“내 눈엔 애야.”
용케도 알아들은 팀장이 히죽 웃으며 먼저 잠옷을 갈아입고 넓게 펴둔 매트리스에 훌쩍 드러누웠다. 김록수는 뚱한 얼굴을 한 채 기계적으로 칫솔질을 마친 뒤 제 검은 잠옷을 입었다. 최정수와 팀장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원래라면 아마 여유공간이었던 팀장의 옆으로 기어들어갔겠지. 하지만 김록수는 그 대신 발로 팀장과 정수 사이를 툭툭 차서 틈을 벌린 뒤 뻔뻔하게 제 몸을 구겨 넣었다.
“뭐하냐, 록수야.”
“어어?”
그리곤 시끄러우니까 잔소리 하지 말고 자라는 의미로 둘의 머리를 베개에 박았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래. 이 인간들이 내가 이러는데 얌전히 있을 리가 없지. 히죽이죽 웃으며 고개를 다시 든 정수가 코알라처럼 록수에게 들러붙었고 팀장도 김록수가 죽부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 마냥 긴 팔다리를 뻗어 동그랗게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러게. 아프냐?”
“둘 다 시끄럽고 잠이나 자지.”
“말이 짧다? 새끼. 버릇하고는.”
“록수야. 솔직히 말해봐. 그냥 어리광 부리고 싶었지? 어?”
“...잠이나 자십쇼. 자라고.”
팔을 휘적거리자 ‘이거 봐요, 팀장. 얘 또 대답 안 한다.’ 하는 최정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오늘 정도는, 기껏 신까지 개입한 꿈인데. 김록수는 괜히 올라오는 뜨끈한 민망함을 뒤로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구차하게 변명을 뱉었다.
“취했어.”
그 한 마디에 오히려 웃음이 팍 터져버린 팀장과 최정수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구 웃었다. 취했단다. 그 김록수가 취해서 지금 이런단다. 끅끅 숨넘어가는 웃음 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귀가 빨간 건 분명히 취기때문이 아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평생 잘 느껴보지도 못하던 것들이 아주 온몸을 덮었다. 그런 와중에도 참, 빌어먹게도 행복해서. 빌어처먹게도 이 하루가 그리웠다. 시야를 덮을 만큼 농도가 짙었다.
김록수는 행복했던 것 같다. 무엇도 아닌 이 일상 단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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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좋은 아침입니다.”
“케일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인간아, 왜 의자에서 잤나! 허리 부숴진다!”
“침대에서 기다렸는데!”
“안 왔다는 건데!”
재잘재잘. 저쪽이나 이쪽이나 시끌벅적한 건 비슷한가보다. 케일은 부스스 눈을 뜨고 라온의 말마따나 뻐근한 등을 쭈욱 펴며 늘어져라 하품을 뱉었다. 하루종일 먹고 마시는 꿈을 꿨더니 자고 일어나서도 입이 괜히 궁금하다. ...오늘 저녁엔 돼지고기를 구워달라고 해야지. 헤니투스산 와인도 마셔야겠어.
케일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그 행복이 다시 내 것이 될 수 없어 슬프다거나, 혹은 잠깐이라도 얼굴을 봐서 기뻤다거나. 그런 감정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아주 오랜만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지 않고도 직면할 수 있었던 내 새로운 기록이라고 여길 뿐. 그리고 이곳에 지내며 자신의 감정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직시하게 되었다는 뿌듯함 정도.
“인간아. 오늘은 뒷산에 꽃구경하러 가자!”
“도시락도 쌌다는 건데!”
“준비 완료라는 건데!”
“...그래.”
그의 발 밑에서 기분 좋은 듯 팔짝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케일 헤니투스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평범한 하루도 내가 살아 숨쉬기에 최고의 하루임을 알고 있다. 아직 꿈 속의 잔상이 남아 눈앞에서 웃는 얼굴이 그려지는 자신의 옛가족을 지워내며, 케일 헤니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