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시, 논커플링, 단야님
@summer__CHCS
오랜만에 얻은 휴가였다.
사흘간의 철야로도 모자라 현장 투입까지 한 차례 겪고 난 후여서 그랬는지, 상부는 휴가란 명목 하에 오늘 현장에 나섰던 팀 모두에게 회복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사실상 면죄부의 일종으로서 저들의 얄팍한 대처를 눈 감아 달라 조용히 부탁하는 것일 터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대해주면 얼마나 좋냐는 누군가의 말이 사무실 한 구석을 울리고, 그에 동조하는 다른 이들의 장난기 섞인 투덜거림이 뒤를 따른다. 김록수는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별 다른 말을 얹기보단 쓰라린 옆구리를 누르는 것에 집중했다. 핏물이 배어나오는 셔츠는 이미 옷의 기능을 상실하고서 진득하게 피부에 닿아오고 있었다. 그는 썩 좋지만은 않은 느낌에 절로 잇새를 비집고 튀어 나오려는 욕설을 참지 않았다.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쇠 냄새는 누구의 것일까. 문득 떠오르는 의미 없는 질문에 자조적인 웃음이 나온다. 답을 해줄 사람도 없건만 어쩐지 답을 알 것만 같아서, 붉게 변한 거즈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김록수의 미간이 곱게 찌그러져 있었다. 거즈는 쓰레기통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닥을 뒹굴었다. 세 번 째 시도 중 두 번째 실패였다.
사무실이 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간 이들의 대다수는 깊은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병원으로 직행하거나 가족, 친구, 연인 등 기대고 싶은 이들에게 돌아갔을 것이고, 그 중 어느 곳에도 해당되지 않는 그는 사무실을 나설 이유가 없음에도 움직이길 거부하는 팔다리를 달래어 소파에서 일어났다.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온몸의 근육과 뼈들이 비명을 지르며 저들의 고통을 울부짖는다. 김록수는 늘 있었던 일이라는 양 그들의 비명을 무시하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도로는 주말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산했다. 아까의 괴수들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다들 숨죽이고 있는 것일 터. 그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며 차창 너머를 응시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지평선 너머로부터 태양이 낙하하는 것이 보였다. 벌써 석양이 질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하루가 차근차근 저물어 가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것 같다고, 김록수는 생각했다.
계단을 밟는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채 다 씻겨 내려가지 않은 피로감이 묻어나왔다. 김록수는 이대로 형체도 없이 녹아내려 땅바닥에 붙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소소한 생각을 하며 겨우 제 숙소가 있는 층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후끈한 열기가 휘몰아치며 김록수의 몸을 감쌌다. 아, 아직도 이렇게 더운 건 너무하지 않나. 자연스레 불평이 나온다. 가을의 도입부는 곧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그는 아직 가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신발장 옆에는 조그마한 화이트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고 신발을 벗으면 곧장 보이는 위치에, 조금은 탁해진 흰 면 위 검은색 마카로 된 글씨를 품은 채로. 김록수는 마카를 집어 들었다. 김록수와 이수혁, 최정수의 이름이 나란히 써져 있는 좌측 상단에는 제 이름의 옆에만 동그라미가 쳐져 있지 않았다. 거의 다 쓴 모양인지 둥그렇게 그은 선에선 검은색보다는 회색과 흰색의 비중이 더 커보였다. 결국 마카를 버린 김록수가 옆에 있던 상자에서 새로운 것을 하나 꺼내 그 위를 덧칠한다. 김록수, 그리고 그 옆의 동그라미. 집에 돌아왔다는 표시였다.
“다녀왔습니다.”
김록수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갔던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제 몸은 문을 확인하기 위해 뒤돌아볼 정도의 여유도 없었기에,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 그가 오랜만에 만난 주인을 반기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겨우 몸을 뒤집을 기력만 남아 있던 것일까. 천장을 바라보는 눈에서 더는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옅은 의지가 넘실거렸다. 창밖에선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이 돌아간다. 태양을 가린 구름들의 파도가 세상의 채도를 낮추며 이른 낮잠을 독촉하는 것이 보였다. 김록수는 창 너머로 저를 보며 손을 뻗는 수마의 그림자를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암전이다.
* * *
꿈을 꿨다. 꿈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악몽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알 것 같은, 그런 꿈이었다.
새하얀 공간에는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울고 있는 이의 얼굴을 흐렸지만 눈물로 범벅되어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아서, 그는 그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으면서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퍽 아쉽다고 생각했다. 야, 그만 울어. 퉁명스레 내뱉은 말에 그 사람은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아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꿈이라 그런지 제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 소매의 끝단은 이미 더 이상의 눈물을 훔칠 곳이 남아있지 않은 채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섧게 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이, 그간 아무리 같은 문장을 봐도 이해되지 않던 게 처음으로 공감되었다.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록, 수야.
드문드문 끊겨서 들리는 이름이 있었다. 물기에 함뿍 젖은 목소리가 익숙해서, 김록수는 오랜만에 과거의 망령을 꺼내들어 기록을 재생시켰다. 록수야, 엄마는 괜찮아. 우리 잠깐만 낮잠 잘까?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마지막까지 저를 끌어안고 있던 어머니와 이미 둘 모두를 감싸다 숨이 멎은 아버지의 초상이 스쳐 지나간다. 록수형, 우리 어떡해요? 의지할 데 없이 모인 아이들 중 하나가 초점 없는 눈으로 울며 물었던 질문이, 얘들아, 미안하다. 보육원 선생님이 얼마 없는 지원금을 아끼고 또 아껴서 모은 돈으로 겨우 사먹었던 고기 몇 점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김록수는 잇새로 새어나오려는 욕을 굳이 참으려 들지 않았다. 차마 막을 수 없었다.
정말 빌어먹을 꿈이었다. 아니, 꿈이 맞긴 한 걸까.
* * *
문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시끄러운 소음의 향연에 김록수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일으키는 몸에 찢어졌던 옆구리가 가늘게 비명을 지른다. 분명 지혈을 다 해둔 것 같았는데 자는 새 자세가 흐트러지며 상처가 벌어진 듯 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침대에 흐릿하게 스며든 핏자국이 짧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의 참상을 말해주었다. 낭패였다. 김록수는 그런 의미가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놔둘까.”
흉터 하나쯤 더 는다고 해서 티가 날 몸인 것도 아니었다. 피도 멎어있었으니 이대로 방치한다 하여 무언가 크게 잘못될 일도 없을 터. 그는 다만 배가 고팠다. 비어있는 위가 요동치는 탓에 김록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반쯤 떠지다 만 눈이 더 자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비몽사몽 제대로 된 사고가 흘러가지 않는 뇌는 본능적으로 이불에 파묻히란 명령을 내렸다. 김록수는 이불을 끌어당겨 조금은 서늘한 제 어깨를 감쌌다. 이대로 쓰러져 자고 싶다. 그러한 욕망을 이루지 않은 건 손등을 감싸는 주홍빛 석양의 끝자락 때문이지 않을까. 암갈색 눈동자가 빛이 들어오는 틈새로 향한다.
기어코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흘러가는 시간에 부유하는 호흡들이 일제히 집으로 향할 시간이다. 김록수는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옆구리조차 잊고서 침대 맡에 앉아 고요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에 달마저 모습을 숨긴 밤이 지독하게 밝았다. 아름답다. 서울의 야경이란 한 번 무너졌다는 게 믿기질 않을 만큼 이다지도 눈이 부셔서, 문득 어울리지 않게 그런 감상이 머리를 채웠다.
시선을 올리자 검은 구름들이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겨우 제 몸을 드러낸 달빛이 발끝을 맴돈다. 피로가 어른거리는 얼굴이 잠시 찌푸려졌다. 눈을 감자 시야가 차단됨에 따라 청각이 보다 더 열심히 주위의 소리를 그에게로 날랐다. 경쾌한 음을 내며 성실히 움직이는 시계 초침부터 시작하여 건물 앞에서 연인들이 나직하게 속삭이는 사랑 고백과 늦은 시간 급히 집으로 뛰어가는 발소리, 골목길 입구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가로등에 모여들어 윙윙 날갯짓하는 벌레 떼들의 소리까지. 거슬리지 않는 소음들이 차츰 낮의 부재를 지워나간다.
바람이 차다. 눈을 내리뜨자 긴 속눈썹 아래로 회색빛 그늘이 지며 무심한 낯에도 평온이 안착했다. 한참을 이렇게 있었을까, 김록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째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란 낯설었다. 김록수에게 있어서 잠이란 물러날 곳 없는 그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그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으로서 존재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 앞가림도 못할 만큼 어린 시절엔 주린 배를 잊기 위해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고, 머리가 커 폭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했을 무렵엔 기절하듯 이불 위로 쓰러지는 일상의 반복이었으며, 청소년기의 끝자락에 시험을 끝낸 후 남들이 무리 지어 놀러 갈 때도 김록수만은 홀로 좁은 단칸방으로 돌아와 차가운 방바닥에 누웠다. 그는 아마 평생이 다 가도록 잊지 못할 터였다.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와 제 숨소리만 존재하는 공간의 침묵,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화목한 가정의 웃음소리를.
하여, 김록수는 스스로 속삭여야만 했다. 오늘도 수고했어. 내뱉는 말에 힘이라곤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당시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순간만은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고 푹 쉬어도 될 것 같았으므로.
입술 새로 한숨이 튀어나올 무렵,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며 한 줄기의 빛이 방 안으로 침투했다.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돌아간다. 어두운 방과 대조되는 밝은 거실의 풍경이 한 사람의 인영 너머로 비춰졌다. 김록수는 역광 때문에 서 있는 이의 얼굴이 한껏 그늘져 있음에도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옅은 목소리가 목을 간질이다가 내뱉어진다.
“팀장.”
정적이 깨지고, 마치 방의 주인이 깨어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멈춰 있던 이수혁이 뒤늦게 반응했다. 조그맣게 열린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엔 떨떠름한 감정이 여과 없이 묻어났다.
“웬일로 네가 깨어있냐? 자는 줄 알았는데.”
“잠이 안 와서요.”
이수혁은 여상하게 나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곧장 김록수가 앉아있는 침대 가로 와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다정한 행동과 달리 하는 말은 밉상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행동이 마냥 싫은 것도 아닌지라, 김록수는 가만히 몸을 맡기듯 이마를 기대었다. 잠시 당황한 듯 주춤하다가도 이내 짧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포근하다. 아마 자다가 깨서, 그도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풀어진 게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굴 생각도 못했을 텐데.
피로에 젖은 낯은 현대인의 것이다. 이수혁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따뜻하기보단 시원함에 가까운 체온이 제 손바닥의 열에 데워지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모든 짐을 짊어진 이의 얼굴에선 세월의 고단함이 머무르는 채로 그렇게, 어른의 탈을 뒤집어쓴 아이의 형상이 겹쳐졌다. 손길이 멀어진다. 눈을 뜬 김록수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마냥 불만스러운 눈을 하고서 이수혁을 올려다봤다.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을 마주한 그는 평소처럼 핀잔을 주는 대신 둥그렇게 드러난 이마를 한 번 쥐어박고는 불시에 셔츠자락을 들춰냈다. 흔들리는 시선과 이럴 줄 알았다는 담담한 시선이 교차한다.
피에 익숙해지는 직업은 이래서 문제였다. 이수혁은 피 냄새가 진동하는 거실에서 구급상자를 들고 오며 떠올렸다. 상처는 다행히 심각하진 않았다. 엉성한 봉합에 상처가 조금 벌어진 것만 빼면 지혈도 잘 되어 있었고, 큰 흉으로 남겠지만 이후 상처가 문제되진 않을 정도였으므로. 어디까지나 최전방에서 뛰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집어든 거즈에 소독약을 묻힌 볼 안쪽 살을 깨물며 툭 상처를 건드렸다. 지겹도록 봐왔던 상처가 왜 이리도 아파보였는지, 순간 멈춘 호흡에 짧게 떨리는 피부를 담는 눈이 낮게 침체되어있다.
“아프면 말해라.”
“저 아파요, 팀장.”
퉁명스럽게 답사는 목소리의 진동이 거세졌다. 괘씸하긴.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얼굴에서 딱 한 줌의 고통을 발견하고서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놈이 매번 전방에 튀어나오는 것을 보니 세상이 망해가기라도 하려나보다. 거기까지 생각했던 이수혁이 문득 뇌리를 스치는 괴물의 형상에 헛웃음을 지었다. 아, 이미 말세였지.
쓸모를 다한 거즈를 쓰레기통에 곧장 던지며 이수혁은 김록수란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보조계인 주제에 앞장서질 않나, 남들이 무리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면서 제 몸이 내지르는 비명은 곧잘 무시하고, 누구보다 현실의 부조리함에 치를 떠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그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야 만. 모순이라는 단어로 사람을 만든다면 기필코 김록수의 모습을 하였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수혁은 김록수를 이타적이기에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의 선택은 늘 다른 이들의 평안을 위해서 존재했지만 결국 그 선택은 그를 깎아내리는 방법이었기에, 김록수는 결국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어서 늘, 이란 단어를 곱씹었다. 피를 볼 각오로 이술을 짓씹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나열되지 않은 채 허공을 배회하며 기억들을 되짚는 과정을 거쳤다. 모두 늘이란 단어를 품고 있는 것들이다.
‘또 출동이에요?’
언제는 입에 대어보지도 못한 라면을 뒤로 한 채 모두가 탄식을 흘렸던 적이 있었다. 그게 퍽 아쉬웠는지 어느 녀석이 급하게 국물이라도 들이켰고, 혀가 데여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멍청히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무슨 말을 했더라. 이수혁이 엉성한 봉합 부위를 수습하려 바늘에 실을 꿰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 실은 두어 번의 실패 끝에 비좁은 구멍을 통과할 수 있었다.
여러 갈래로 뻗은 의식들 중 하나를 더듬는 손길을 마주한 김록수가 시선을 돌려 검게 물든 하늘을 보았다. 귓가엔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른거리는 채다.
‘라면은 갔다 와서 먹자. 혀 데였으면 빨리 가서 얼음 물고 와.’
그렇게 말한 선배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막 팀장 직함을 받았던 이수혁과 엇비슷할 정도로 연차가 쌓였던 이였음에도 가는 길은 참으로 허무하고 또 덧없어서, 그와 라면을 먹자 약속했던 당사자는 그날로 라면을 입에 넣는 일이 없었다.
상처를 봉합하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김록수는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수혁의 생각이야 뻔히 읽혔다.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설마 모를까. 맨살을 파고드는 서늘함에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 생겨난 실에선 수놓은 이의 생각이 그대로 전해졌던 탓에, 천장을 바라보던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던 김록수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이수혁의 생각을 건네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역시 늘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떠올렸다. 모든 일을 정당화 시키며 끝내는 무감각하게 만드는 근간이 되는 것에 대하여. 수없이 지나간 문장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우리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 다치는 건 매번 있는 일이잖아. 이 정도 쯤이야 금방 나을 테니 걱정하진 마.
늘 그랬으니까.
그러니 상실 역시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 또한 늘 있던 일이었으므로.
김록수는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먹는다. 급하게 국물을 마시다가 혀를 데이기도 하고 그조차 안 되면 돌아와서 퉁퉁 불어버린 면을 먹기도 했다. 입맛이 없더라도 꾸역꾸역 집어넣어 결국 체하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모두 일상이었기에. 그는 상실이 주는 무력감에 대해 익숙한 사람이었다.
실이 잘리는 소리가 사색의 끝을 알렸다. 김록수는 그제야 젖히고 있던 목을 도로 내렸다. 목이 아팠다. 뻐근한 것 같기도 했다. 옆구리를 만져보니 거친 피부 위로 큼직하게 붙여둔 거즈 뭉치가 닿았다. 쓸데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김록수가 말했다.
“팀장도 너무 유난이에요. 늘 있는 일인데.”
“네가 너무 무심한 거겠지. 누가 네 몸에 들어오기만 해봐. 이 몸은 대체 어떻게 굴러먹은 거냐고 욕할 걸?”
허리를 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이수혁이 창문 밖을 흘끔 쳐다보더니 마치 저녁 메뉴라도 읊듯 내뱉는다.
“정수 깨워올 테니 나갈 준비해라.”
김록수가 헛소리라도 들은 것 마냥 눈썹을 삐뚜름히 올렸다. 이수혁은 여전히 예의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입을 닫았다. 순식간에 내려앉은 적막에 김록수 또한 마찬가지로 환자임을 한껏 주장하던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닫아버렸다. 그의 팀장이 이럴 때는 언제나 할 말이 있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수 초간의 침묵은 생각보다 가벼운 말에 의해 깨졌다.
“오랜만에 휴가를 받았으면 산책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냐,”
“머리 다쳤어요?”
“이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야식 사줄게, 어때?”
“정수는 제가 깨워올게요.”
금세 방밖으로 튀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수혁이 짧게 침음을 삼켰다. 못 먹이고 키운 것도 아닌데 왜 저럴까. 꼭꼭 씹어 삼킨 의문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야, 최정수. 일어나. 팀장이 야식 사준단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데 들뜬 감정이 아른거린다. 그는 침대 가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어휴, 내 팔자야.”
버릇처럼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차갑게 식은 목덜미는 어쩐지 얼음장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을 선사했다. 바람이 찬 탓이었으면 좋을 텐데. 굳은 표정이 쉽사리 풀리질 않는다.
김록수의 얼굴에 떠오르던 짙은 체념을 보며 이수혁은 무언가의 일그러짐을 직감했다. 그는 어째서 김록수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이 한 번 뒤집힌 후 상실을 경험하고 한계에 부딪힌 이들이 가장 많이 지었던 표정을,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쳐 지나간 후 남은 찌꺼기 같은 감정을 이제와 드러내는 녀석을 보며 무슨 생각이 나던가.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끝이 조심성 없는 손길에 주욱 잡아당겨진다. 생각이 많은 밤이 될 것이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손짓했다.
예상치 못한 외출 소식에 일어난 최정수는 단잠의 흔적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꾸역꾸역 옷을 갈아입었다. 그 짧은 새에도 꿈나라까지 들렀다 왔는지 눈가가 미미하게 부어있었다. 김록수는 옷을 거꾸로 입은 주제에 왠지 목이 답답하다며 한바탕 씨름을 벌이는 최정수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록수야,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주라. 옷이 이상해. 눈도 뜨지 않은 주제에 김록수의 행동만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작태가 신기하다면 신기했고, 익숙하다면 또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는 혀를 차면서도 최정수의 옷을 똑바로 입혀주었다. 이수혁은 그런 모습을 태평하게 관전하다가 동그란 뒤통수 두 개가 앞 다투어 나가는 걸 보며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졌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어느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왠지 모르게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냥, 왠지 그랬다.
마지막으로 그가 현관문을 나서며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오후 9시. 늦은 저녁이면서 이른 밤이었다.
* * *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언가의 그림자인지 모를 어둠들이 제 뺨을 신발에 대고선 꺄르르 웃었다. 가로등의 불빛이 깜빡깜빡 빛을 내다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김록수는 무던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정수가 가라앉은 눈으로 애써 나오려는 탄식을 참은 채 앞에 놓인 돌을 만지고 있는 게 보였다. 비석의 모습을 한 돌 위에 ‘국립추모공원’이라고 새겨진 문장이 유독 희게 빛났다.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곳이 전에 어떤 풍경을 자아냈었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북적이던 고층 빌딩. 수많은 상가들이 즐비하여 건물 전체에 흐르던 밝은 활력이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사람들은 저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나 아쉬운 표정을 한 채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왔다 빠지곤 했다. 김록수는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 당시를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다.
다음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귀를 찌르는 비명과 바닥을 긁는 손톱들이 부러지는 소리,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절규였고, 핏자국이 낭자한 건물 파편과 그 아래서 생을 달리한 시체들, 터지지 않는 휴대폰을 붙잡고 구조대도 아닌 가족들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던 생존자들의 울음이 그 뒤를 잇는다. 김록수는 오히려 이 당시의 풍경을 더 선연히 떠올려냈다.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비록 건물 터만이 남아 지금은 길게 줄 세워진 비석들이 차오른 곳이지만, 커다란 비석들에 새겨진 이름 중 김록수 석 자가 없단 점에서 이곳은 그에게 있어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존재할 터였다. 아마도 평생을.
최정수가 가벼운 마음으로 챙겨왔던 물을 가장 가까이에 있던 비석의 앞에 놓여 있던 꽃병에 부었다.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만 남은 공간에서 운을 떼는 건 언제나 그랬듯이 팀장인 이수혁의 몫이었다.
“오랜만에 선배들한테 인사나 하고 가자.”
아. 김록수와 최정수의 눈이 넓은 공원의 끝자락을 향한다. 끝에 가까워지는 어귀쯤에 제 선배들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최정수가 잠시 바닥에 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오늘 있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욱신거린다. 왼쪽 어깨를 잠시 주무르던 그가 언제나처럼 명랑하게 웃었다. 분위기를 띄우는 건 늘 제 역할이었다. 그러니 웃어야지. 하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린 후 이수혁과 김록수의 손목을 움켜쥐는 손이 단단하다.
유독 납작한 풀들이 길을 안내하는 것을 따라 걸어간 곳에선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이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록수는 가장 최근에 새겨진 이름 하나를 눈동자에 담았다. 유독 제게 엄하던 선배의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이수혁을 대신해 자신을 감싸다 가버린 생의 주인.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붙들고 있던 김록수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채 다 하지 못한 묵념을 지금이라도 하고 싶었다.
공원에 오래 머무는 일은 없었다. 오래 있어봤자 느는 건 미련과 죄책감뿐이니 그들로선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길게 뻗은 산책로를 걸으며 세 사람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묵묵히 걷기만 했다. 최정수는 잠시 뒤로 빠졌다가 앞서 가는 두 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필이면 저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자신의 처지를 잠시 한탄하기도 잠시, 최정수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그걸 자신에겐 알려주질 않으니 답답했다. 아니, 사실 그도 대충 알고 있긴 했다. 저렇게까지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없지 않나. 최정수는 결코 한 점의 거짓 없이 장담할 수 있었고, 이 생각을 그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도 있었다. 당신들을 가장 잘 아는 건 당신들 스스로도 아닌 나일 것이라고. 그렇기에 그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해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만은 알았다. 환키를 시켜야했다. 퀴퀴 묵은 감정들이 전부 날아가게끔. 언제나 그랬듯이 밝은 모습으로 이 자리에 존재함으로서 당신들의 웃는 얼굴을 끌어내기 위해.
마침 하늘도 예쁘게 물든 날이었으니까.
“배고픈데 우리 밥 먹으러 가는 거 어때요?”
나무들이 쭉 뻗은 손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 위로 최정수의 목소리가 살포시 가세했다. 동시에 뒤를 도는 두 사람의 얼굴에 서려 있는 의문을 마주한 이가 그 사이를 파고들며 정답게 팔짱을 낀다. 순간 휘청거리는 무게중심에도 큰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자신을 버텨줄 것이라는 신뢰 때문일 것이다. 최정수는 곧장 방향을 틀었다. 어디가려고? 당황했는지 삐끗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중요치 않았다.
아, 뭐 어때. 어디로 가든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올 거면서.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거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가게였다. 낡은 간판 아래서 직접 쓴 음식 이름과 가격 종이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는 도란도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울리고 있는 채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을 때마다, 혹은 요리를 할 기력이 없을 때마다 자주 찾던 국밥집이었다.
“팀장, 야식 사주신다면서요. 먼저 들어가세요.”
최정수가 얄궂게 웃는다. 이수혁은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나쁘지 않다는 듯 먼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님, 여기 국밥 세 개요! 주문 역시 그와 동시에 일어났으므로 김록수는 선택권을 쥐어볼 틈도 없이 상에 놓이는 밑반찬들을 맞이했다. 황망한 표정으로 나물을 집어 먹는 김록수를 본 이수혁과 최정수가 시선을 교환하며 소리 죽여 웃곤 엄지를 세웠다. 생각이 통한 것이 꽤나 유쾌했다.
생각해보면 자느라 제대로 먹은 게 없긴 했다. 이것들이 뭐하나 싶어서 가만히 쳐다보던 김록수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제 앞에 놓인 따끈한 국밥을 보며 숟가락을 들었다. 딱히 사준다는데 가릴 처지는 아니지 않나. 맛없는 걸 사준 것도 아니고. 가벼운 생각으로 입에 국밥을 밀어넣던 그가 표정을 굳히며 숟가락을 입에 물고 물을 찾았다. 목이 메인 것처럼 음식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질 않았다. 사실 이게 맛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둔해진 미각은 고기조차 퍼석거리는 무언가로 느껴지게 했다. 김록수는 한순간에 뚝 떨어진 입맛에 깍두기를 이리저리 찔러보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국밥을 다시 입에 넣었다. 볼이 한껏 부풀 정도의 양이었다. 우물우물. 여전히 맛은 없었다. 김록수는 결국 한 그릇을 다 비우기도 전에 입을 헹궜다. 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니까, 이유 모르게.
아까부터 은근하게 발목을 타고 오르던 것이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던 때부터 슬금슬금 손을 뻗더니 어느새 허벅지를 더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쉬이 짐작이 가질 않았다. 위화감이란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았고, 아니면 기시감이라 불러도 나쁘진 않을 듯 했다. 어느 쪽이든 탐탁치만은 않은 류의 것이다. 그는 제 앞과 옆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턱을 괴었다. 이젠 허리까지 넘보는 것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어, 더 안 먹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릇에 최정수가 물었다. 아니, 얘가 음식을 남길 위인이 아닌데. 걱정스러운 표정 위로 아까의 이수혁이 겹쳐진다. 김록수의 곁에 있는 이들은 늘 그랬다. 중요한 것들을 제쳐두고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쓰고 만다. 지금도, 고작 밥 하나 남긴 것 가지고 이리 신경 쓰고 있지 않은가. 사실 여기까지면 그도 그저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선을 넘었고, 그 선이란 대개 김록수를 위해 몸을 던지는 것까지 마다 않는 열정을 의미했다. 이는 김록수가 최대수혜자였기에 부정할 수 없는 명제였다. 흉터가 없는 사람이 이 바닥에 어디 있겠냐마는 유독 김록수와 가까운 두 사람은 흉터들의 일부 지분이 그에게 있다 보아도 될 수준이었다. 이수혁의 팔에 길쭉하니 사선으로 난 절상은 김록수가 막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 맡았던 사건에서 그를 대신해 앞을 막아서다 생긴 것이고, 최정수의 왼쪽 허벅지를 덮은 화상자국은 아이 울음소리에 무작정 뛰쳐나간 그를 붙잡기 위해 함께 달려들었다가 무너지는 건물 파편에 스쳐 생긴 것이다. 큼직한 것만 세어도 이런 사연들이 즐비해 있는데, 다른 것들이라고 하여 더 나을 것도 없었다. 김록수가 혀를 씹었다. 아프진 않았다. 그저 조금,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을 뿐이었다.
“다음엔 어디 갈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애들도 봤고, 배도 채웠으니… 술이나 마실까?”
“받고, 치킨 시켜서 한강 어때요?”
“그래. 앞장서라, 정수야.”
주고받는 대화에 활기가 넘친다.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이 꽤나 아득하게 느껴졌던 탓에 김록수는 최정수가 내미는 손을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맞잡고 일어섰다. 계산은 약속한대로 이수혁이 했다. 아마 치킨을 비롯한 술 역시도 그가 계산할 것이다. 김록수는 두 사람이 박하사탕을 꺼내어 하나씩 입에 무는 동안에 자꾸만 덜 비워진 그릇 쪽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잡기 위해 애써야 했다. 입에 알싸한 향이 퍼진다. 싫어하던 박하 맛이 달게 느껴지는 것이 그리 거슬릴 수가 없어서, 김록수는 기어코 박하사탕마저 휴지에 뱉어서 버리고 말았다.
김록수는 한강에 도착해서도 그 기묘한 감각에 시달렸다.
“이상해.”
“뭐가?”
“그런 게 있어.”
그러고는 맥주를 입에 댄다. 치킨은 포기한지 오래였다. 맥주가 밍밍한 걸로 보아 치킨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괜히 맛없는 것을 입에 더 넣고 싶진 않았다. 한 모금 만에 반을 비워버린 캔을 들고 김록수는 문득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맛있는 음식으로만 주변을 가득 채우고, 괴수도 없는 휴일을 계획했을 텐데.
“아.”
김록수의 짧은 탄성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왜? 하고 묻는 얼굴은 간만에 마시는 술 덕분에 들뜬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난 채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니란 의미를 내포한 행동이었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이는 적어도 그의 곁엔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최정수가 입에 물고 있던 치킨을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심통이라도 난 듯 가늘게 흘겨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무슨 일인데?”
“뭐가.”
“아까부터 상태 안 좋았잖아. 숨길 생각은 마라. 우리가 김록수학 박사 학위 딴 거 잊었어?”
“그게 뭐야…….”
다정하지 않은 반응이더라도 최정수와, 그리고 그 옆에서 동조 중인 이수혁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오늘따라 맹하게 구는 친구와 동생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얼굴 위로 드리운 수심 가득한 어둠을 거둬낼 수만 있다면야, 설사 다른 세계에 떨어진다 하여도 달려와 줄 사람들인데. 김록수는 반 정도 남아있던 맥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수도 없이 재배열하며 결국 만들어낸 것은 정말 터무니가 없어서, 그는 차라리 자신의 뇌가 과부하 걸려 잘못된 결과를 도출해낸 것이길 바랐다. 그도 그럴게,
“여기가 꿈인 것 같아서.”
이는 너무나도 멍청한 대답이지 않은가. 잠도 오지 않고 맛도 느껴지지 않으며, 왠지 모를 위화감과 기시감에 시달리는. 이런 상황이 꼭 꿈에서나 겪을 법한 것이었기에 나온 결론이었지만 김록수는 자신이 드디어 멍청한 소리나 내뱉고 있는 것이리라 믿었다. 꿈이라기엔 제 눈앞에서 숨 쉬고 있는 이들이 너무 생생하게 존재하였으므로.
왁자지껄하던 한강 유역이 조용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김록수는 문득 언젠가 제 고등학교 시절에 몇 없던 친구가 했던 괴담이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정말 잠시 흘러갔던 대화일 뿐이었던 것이 이리도 선명하게 뇌리를 스치는 까닭을.
‘야, 김록수. 그거 알아? 꿈에서 여기가 꿈이라고 말하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길 쳐다본다고 하더라. 조금 무섭지 않냐?’
‘꿈을 안 꿔서 잘 모르겠는데.’
시선은 여전히 두 개가 전부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할 일을 하며 소란스럽게 놀고 있었고, 세 사람의 주위에는 다 식어가는 맥주와 치킨이 향을 날려 보내며 있었다.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서, 김록수는 최정수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자신이 틀렸던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 형, 어떡해요. 우리 록수 벌써 취했나봐.”
“어쩌긴. 우리 불쌍한 록수 안고 집이나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