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시, 논커플링(약 팀장록수), 카렌님
@karen_11201
김록수는 오늘 자연스레 4시에 눈이 떠졌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회사로 한번에 가는 14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일주일 전쯤 응모했던 쿠폰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에 카페에서 이벤트 코코아를 한잔 받아 출근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앞으로 맡겨졌던 골치 아픈 서류가 다른 팀으로 넘어갔고, 선물로 녹차 한 박스가 사무실로 들어와 어제 저녁에 다 떨어진 차를 록수가 굳이 사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팀장은 오늘 특별히 일찍 퇴근하자 말했고, 록수의 기분은 날아갈 듯싶었다. 그의 하루가 너무도 완벽했기 때문이다. 록수는 이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하루 평화로웠기 때문일까. 신은 그에게 하루라도 조용한 날을 선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계속 의심했어야 했는데. 김록수는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을 배경 음악 삼으며, 그는 눈을 떠 현실을 직시했다.
김록수의 앞에 그를 닮은 아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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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록수야. 이 애 진짜로 너 닮았다!”
록수는 제 뒤에서 호들갑을 떨며 폴짝폴짝 뛰어대는 선배들을 애써 무시했다. 대신 그는 앞에 서서 어리둥절 하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젠장. 선배들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었으며, 그가 생각하기에도 앞에 있는 아이는 김록수 자신을 쏙 빼 닮았다. 숨겨진 아이가 있었던 거냐며, 이 선배는 실망했다느니 하는 말들에 록수는 그들을 흘깃 째려보았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꼭 옆에서 그렇게 불을 질러야겠냐는 눈빛으로 말이다. 주변의 분주함이 조금씩 잦아들자 록수는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이 아이는 뭘까.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도 해보았지만, 이내 정말 멍청한 결론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록수가 생각하기에 아들보다는 오히려 어린 시절의 ‘김록수’같았다. 과거의 나인가? 이 아이가 과거의 나라면 대체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온 것이지, 그저 이 망할 세상의 또 다른 오류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인가. 록수가 습관처럼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고 서있자,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처음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절대로 생각 중에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던 록수는 제 집중이 사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김록수와 김록수를 닮은 어린 아이는 그렇게 서로를 잠시 동안 응시했다. 그 장면에 주위의 사람들도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고, 회사 복도에는 정적이 흘렀다. 록수는 제가 하던 생각들이 다 무의미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오류도 장난도 아니다. 사람들이 의미 모를 긴장감에 숨을 죽이고 있기를 잠시, 더 큰 김록수의 입이 열렸다.
“몇 살이야?”
“9살”
“여기는 어떻게 왔어.”
“몰라, 일어났더니 여기였어.”
상황과는 다르게 매우 단조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와 작고 앳된 목소리가 하는 대화는 주위의 이들이 따라가기에 조금 괴리감이 있었다. 아는 사이 같기도 하고, 아예 모르는 사이 같기도 하고. 어째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듯한 그 대화는 아이의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옆에 서있는 이들만이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록수는 다시 생각에 빠지더니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빤히 쳐다보던 아이는 곧이어 제 작은 손을 내밀어 잡았다. 둘 사이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유대감이 형성된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회사의 복도는 김록수를 부르는 외침과 그 밖의 알 수 없는 소음에 매우 시끄러워졌다. 록수가 아이와 손을 잡고 난 뒤, 작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서 그대로 회사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야! 너만 상황 정리되면 다냐? 우리한테도 알려줘야지, 이 망할 자식아!!!
록수는 제가 잡은 아이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온 지금에서야, 록수는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9살이랬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이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록수는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김록수는 아이의 이어질 말을 듣기 위해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했다.
“아까 그 사람들은 누구야?”
“동료들이야.”
“동료? 그럼 친구야?”
“비슷해.”
아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만 같아 록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색해하는 건가. 아마 어린 날의 자신이라면 어색해 하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딱히 없었으니까. 눈 앞의 아이는 자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 보다, 미래의 자신 옆에 있는 이들이 더 궁금했던 것이다. 거기다 그들은 꽤나 친밀해 보였으니까. 그것이 단번에 이해된 김록수는 왠지 울컥함을 느꼈다.
김록수는 완전히 이 작은 아이가 과거의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저 허상의 존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머리 한 편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런 가능성보다는 전자의 확률이 더 크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 아이 또한 본능적으로 앞에 있는 이가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안 것 같으니, 이성적인 김록수들 사이에 충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그 둘은 버스를 타고 큰 김록수의 집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는 작은 김록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고, 큰 김록수는 집에 오자마자 아이에게 밥을 해 먹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둘은 꽤나 사이 좋게 저녁을 준비했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먹는 밥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대화가 이어졌다. 둘은 서로의 존재와 현 상황에 매우 만족했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둘은 우애 깊은 형제처럼 한 이불에 누워 곱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김록수는 다음날 지각을 하게 되었다. 이유는 늦잠을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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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 애가 어릴 적 너라고?”
“네.”
“아니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되는 줄 아냐? 저 애가 시간여행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니 신입아, 이건 밥 먹었냐 정도의 어투로 말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내가 입사한지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신입입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 자식아!”
기어코 록수는 분개하는 제 팀장에게 딱밤을 한 대 맞았다. 그러고는 뾰로통 해져서, 딱밤을 때린 이를 흘깃 보고서는 작게 투덜거렸다. 아니 뭐 어쩔 거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얘가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몰라요’식의 표정을 띄우는 록수에 팀장은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위기감이 없어서 어쩌려고 저러나. 뭐 확실히 록수의 말처럼 지금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김록수는 정말 귀엽고 깜찍했기에 (물론 김록수는 동의하지 않았다.) 팀장 또한 옆에서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이상한 세상에 시간 여행 정도는 평범하지 않냐는 록수의 말에, 다들 나름대로 수긍한 수긍한 분위기였다.
아이는 하루 종일 제 키만한 책상에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가 회사 내에 있다는 사실을 어색해하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 둘씩 아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온갖 선물 공세와 간식을 들고 와 틈새공략을 하기까지. 제 동기인 정수와 팀장인 수혁이 가장 극성맞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아이는 그런 팀원들을 굳이 거절하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받아 먹었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해 보이는 미소까지 보였다. 록수는 그런 아이를 보며 가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팀원들의 주접을 받아주던 아이는 어느새 지쳐 책상에 제 작은 몸을 뉘였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팀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서, 있는 줄도 몰랐던 담요를 어디선가 찾아 와 잠든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그들은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항상 바쁘던 일상에 찾아온 아이는 그렇게 오랫동안 선잠에 빠져있었다.
팀원들의 아쉬운 인사 속에 록수와 아이는 사이 좋게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록수는 내일의 일까지 끌어와 하느라 조금은 피곤한 얼굴이었다. 아이는 그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며 초콜릿을 먹다가 록수를 올려다 보았다. 그를 잠시 쳐다보다 제 손에 들리 초콜릿을 반 잘라 록수에게 건네었다. 록수는 아이의 음식을 뺏어먹는 나쁜 어른이 된 것 같았지만, 아무 반항 없이 받아먹었다.
“왜 그렇게 기계처럼 일 해?”
아이는 오늘 하루 종일 가만히 책상에 앉아있었지만, 시선은 계속 김록수를 따라다녔다. 아이는 ‘그’ 김록수가 매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툴툴거리고 귀찮아하는 태도가 분명했지만, 그 태도와는 다르게 결과물은 완벽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말로는 ‘쉬고 싶다’ 하면서 정작 스스로 일을 찾아 다녔다. 어린 록수는 그런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놀고 싶으면 놀면 되는 게 아닌가. 자신의 미래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어린 자신에게 김록수는 딱 한마디를 건네었다.
“백수 하려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김록수에, 아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하면 되잖아.”
아주 간단한 답을 하는 아이에 김록수는 쓰게 웃었다. 그런 록수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아이는 고개를 한쪽으로 힘 없이 기울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김록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어느 순간 아이는 그가 진심으로 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마음대로 놀 수 없는 건가. 그렇게 과로하면서? 아이는 어쩐지 자신의 미래가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 받은 것 같아 조금 암울해졌다. 그런 아이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록수는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걸음을 조금 바삐 움직였다. 오늘 저녁은 소시지와 오므라이스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현 한국의 긴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록수의 회사는 평화로웠다. 어린아이의 존재가 그렇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다들 아이의 앞에서는 험한 말도 쓰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록수가 아이와 함께 출근을 한 이후로는 회식도 없었다. (술 먹고 개가 되는 모습을 어떻게 보일 수 있겠냐는 직원들의 항의가 큰 몫을 했다.) 록수의 칼 같은 정시 퇴근으로 다 함께 야근을 면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팀장과 그의 동기 정수가 아이의 앞에만 가면 얌전해지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였다. 가끔 아이가 정수를 한심하게 쳐다보기도 했지만, 정수는 그 조차도 즐겁다며 웃었다. 그리고 아이가 정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마다, 사람들은 그가 리틀 김록수라는 것을 다시 인지하고는 했다. 뭐 어떤 방향이든 아이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록수 또한 아이의 존재로 인해 안정감을 느꼈다. 함께 아침을 먹으며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게 참 이상하면서도 좋았다. 록수는 마치 잊고 살았던 것들을 되찾은 것 같았다. 또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록수는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하품을 하며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보자 시침이 4를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을 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미 잠에서 완전히 깨버려 다시 눕기도 애매했다. 록수는 조금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쉬며 시계를 내려놓다가, 익숙하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몸을 옆으로 뉘여 제 옆자리로 눈을 돌렸지만 아무런 인영도 보이지 않아 록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설마 갔나. 간 건가. 록수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집안 곳곳을 살펴보았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허탈함에 록수가 팔을 힘없이 내리는데, 문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록수는 그에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아기 고양이 하나와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록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길고양이?”
조금은 잠긴 록수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자, 그제서야 아이가 고개를 돌려 록수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아이의 대답은 되돌아 오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그저 고양이의 낑낑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아이의 눈은 고요했다. 지금까지 록수에게 보여준 감정들은 아이의 뒤에 숨어 모습을 감추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마냥 록수를 쳐다보았다. 그날 새벽, 록수는 어린 날의 자신이 깊은 외로움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록수가 잊고 있었던 오래된 외로움이었다.
그 뒤로 록수는 아이의 하루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런 록수의 시선을 느낀 건지 아이는 모른 척 웃어 보였다. 록수는 짧게 혀를 찼다. 자신의 어린 시절답게 하는 짓도 똑같았다. 아이는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록수는 아이와 지낼수록 점점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느낌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거 무슨, 자아성찰 하는 것도 아니고.. 록수는 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이내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물론 아이에게도 집중했다.
아이는 새벽을 좋아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늘에 해가 뜨는 것도 좋다고 그랬다. 세상이 밝아지는 그 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새벽이 꿈 같다고 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며 록수는 자신의 과거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알아갔다. 웃기게도 그것들은 록수가 현재에도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본인은 몰랐지만.
아이는 비 내리는 소리도 좋아했다. 마음이 안정된다고.
단 음식도 좋아했다. 정확히는 신 것이 싫다는 말이었지만.
아이는 책을 좋아했다. 글씨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항상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면서.
낮잠도 좋아하고, 침대도 좋아했다. 아닌 척 하면서 동물들을 귀여워했고,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건 록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이상한 주제에서 고집을 피웠다. 꼭 장은 함께 봐야 하다면서, 또 물건의 절반은 자신이 들어야 한다면서. 물론 록수는 절대로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아이에게 그저 사탕 하나를 쥐어주며 ‘자 네 짐이야.’ 라는 말만 덧붙일 뿐이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무가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에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록수는 절대로 아이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또 록수 집 근처의 길고양이를 다 모을 생각인 건지 틈만 나면 마당에 나가 캔과 물을 한 구석에 두고는 한참을 창문을 통해 고양이가 모여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록수의 생각에 아이는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록수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로 ‘요즘 고양이가 많아 보인다.’라는 말을 했을 때도, 아이는 움찔거리면서도 절대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 록수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아이는 그 점에서도 자신의 비밀스러움에 만족한 것 같았다. 록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언제는 아이가 스스로 바느질을 했던 흔적을 발견했다. 양말에 구멍이 난 것인지, 아주 막무가내로 구멍을 막아둔 이상한 바느질을 목격하고는 이마를 탁 쳤다. 안타깝게도 이 바느질 실력은 미래에도 늘지 않는다. 그냥 자신에게 양말에 구멍이 났다 말을 해도 되었을 텐데, 아이는 기어코 자신이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록수는 아쉬운 마음에 이 또한 모른 척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새로운 양말을 사 채워 넣었다. 아이가 이를 눈치 챘는지 한동안 뽀루퉁 했지만 이내 새로운 양말을 열심히 신고 다녔다.
아이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고 했다.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은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록수는 그 모습이 불만스러웠지만 할 말은 없었다. 지금의 자신 또한 그렇기 때문에. 빌어먹게도 아이는 록수와 똑같았다. 록수는 항상 팀원들이 제게 하는 말을 이해했다. 아이는 아픈 것을 티 내지도 않고 혼자 끙끙 앓았다. 그건 팀장이 록수에게서 자주 보는 모습과 같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미친 듯이 불안해 했다. 그것 또한 동료들이 보는 록수의 일 중독과 같았다. 록수는 아이의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며 ‘애는 놀아야지’라 중얼거리다가도, 그 아이가 자신의 과거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스스로를 걱정하는 행동은 록수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록수는 계속해서 아이를 걱정하게 되었다.
아마 아이는 꿈일지도 모르는 미래의 모습들이 하나같이 다 기꺼웠던 것 같다. 동료들과 행복해 보이는 미래의 자신에 안도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록수는 그런 제 생각을 거의 확신했다. 아이의 마음을 자신이 모르면 누가 알겠냐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아마 아이는 이곳에서 더 이상 외롭지 않아 따뜻했을 거고, 악몽을 꾸지 않고도 잠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록수는 그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새벽을 좋아한다는 말처럼, 자주 잠자리에서 사라졌다. 항상 4시정도가 되면 아이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밤과 아침의 경계를 마주했다. 아이는 그 적막함에 젖어 들며, 눈을 내려 감았다. 록수는 그런 아이를 창을 통해 지켜보았다. 새벽에, 아이는 록수의 과거 그 자체였다. 록수가 기억하던 외로웠던 아이. 차마 빈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어, 록수는 아이가 들어올 때 즈음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는 그런 록수의 품에 파고 들어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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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아이를 둘러싼 분위기가 바뀌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먼저 다가갔고, 먼저 말을 걸었다. 동료들은 그런 아이를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록수는 왠지 아이의 변화에 그냥 안도할 수 없었다.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낭랑한 목소리로 팀장에게 사탕을 선물했고, 작은 손으로는 정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에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에도 록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아이는 충분히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록수는 그저 아이에게 과자를 더 사줄 뿐이었다. 퇴근 후 둘은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장을 보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와 저녁을 해 먹었다. 점점 늘어나는 록수의 음식 솜씨에 아이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보였고, 록수는 아마 뿌듯했던 것 같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아이는 그날도 역시나 새벽 일찍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록수는 아이의 부재에 눈을 떠 잠시 천장으로 시선을 향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저 제 상상 속 소리였는지 창 밖에는 아무런 빗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아기 고양이의 울음 소리만이 새벽 4시를 채웠다. 갑자기 불안한 감정이 록수를 잡아 끌었다. 록수가 창 밖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에 아이는 고양이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뒷모습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저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부는 새벽바람이었지만, 록수는 그 느낌을 무시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한동안 새벽의 아이를 애써 마주하지 않던 록수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록수는 아직 제 완연한 과거를 마주하기 두려웠지만, 지금 보지 않으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에 성큼성큼 아이를 향해 걸었다.
록수는 고양이를 보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레 돌려 자신을 쳐다보도록 했다. 자신과 똑 닮은 눈. 그 속에 담긴 것도 같아, 둘은 서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록수는 아이의 불안정함을 날것 그대로 느꼈다. 아이의 떨림이 다가오자, 록수는 그제야 어리숙하게 깨달았다. 아이가 요 며칠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지마.”
록수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이는 놀란 눈을 하고 그를 쳐다봤지만, 록수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처음 아이가 왔을 때는,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라 생각 했지만, 이제는 아이가 다시 먼 길을 떠나지 않기를 원했다. 그냥 이곳에서 지내면 안 되는 걸까. 아이에게 너무도 힘든 여정이 될 것을 앎에 록수는 아이가 남길 바랬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임과 동시에 아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었다. 아이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지만, 이내 작은 목소리로 답을 이었다.
“걱정 마. 나는 괜찮을 것 같아. 너도 지금은 괜찮잖아?”
록수는 아이의 말에, 한참을 고르다가 더듬더듬 단어들을 내뱉었다.
“괜찮아, 좋아. 행복해. 즐거워.”
다소 가라앉아 있던 아이의 표정이, 록수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펴졌다. 그리고는 눈을 달처럼 휘더니 록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나도 괜찮을 거야. 너는 내 미래잖아. 돌아가면 딱 그만큼 더 외롭겠지만, 나는 이제 괜찮아.”
아이는 마치 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웃었다.
나도 이곳이 내 미래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좋았어. 잠결에 깨면 느껴지는 온기도, 매일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네 동료들의 부산스러움도, 모두. 좋았어. 그래서 정말 남고 싶었는데, 가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괜찮아. 그냥 그런 다짐이 생겼어. 나도 내 시간으로 돌아가 나의 현재를 살아야겠다고. 만약 내가 원한다면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을래.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어. 그게 나를 위해서라도 옳은 일인 것 같아.
록수는 그런 아이의 이야기가 그 조그마한 입을 통해 날아가는 것을 잡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채 흐트러졌다. 그 뒤로도 아이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이미 둘의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온전히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록수는 다시 없을 대화에 가슴의 울렁임이 넘칠 것만 같았다. 아이의 목소리, 온기 하나라도 더 담으려 몸부림쳤다. 아이는 차분하게 눈을 마주했다. 너무도 갑작스런 헤어짐이었다. 록수의 우는 듯한 얼굴에 아이가 단단하게 웃었다.
당신들의 다정함이 내 새벽을 채웠으니 나는 괜찮아.
록수는 아이의 손을 이끌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계는 아직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록수는 아무 말 없이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맞닿은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록수는 그리고 아이는 함께 눈을 감았다. 상상 속의 빗소리와 함께 비 내음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그들을 감쌌다. 완전한 새벽의 향이었다. 작별이었다.
록수는 적당히 해가 떴을 때 일어나, 옷을 입고 아침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록수는 운이 좋게도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회사로 한번에 가는 14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회사 가는 길목에 있는 카페에서 코코아를 한 잔 주문했다. 제 사무실에 커피가 떨어진 것을 기억하고는, 마트에 잠시 들려 믹스커피도 한 박스를 사 들었다. 록수는 제 손에, 아이의 작은 손이 아닌 다른 물건들이 잡혀 있다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면서 회사로 들어갔다.
항상 제 옆에 있던 아이의 부재를 슬퍼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록수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도 그에게 아이의 안녕을 묻지 않았다. 그저 아이와 유달리 가깝게 지냈던 팀장만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사탕의 존재에 어색함을 느낄 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아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는 록수를 걱정스레 쳐다볼 뿐이었다. 록수는 그 모든 아쉬움에 가만히 서 항상 아이가 앉아 있던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아이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록수는 아이에 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록수는 새벽의 공기를 좋아했다. 특히 해가 모습을 보일락 말락 하는 4시의 새벽을 좋아했다.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듯 고요하고 적막한 새벽. 하여 4시에 눈이 떠지면 그는 항상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깊은 푸른색을 띄고 있는 새벽하늘을 그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꿈처럼 왔다 간 아이를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