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시, 정수록수, 찻잔님
@teapot_teapott
"최정수 자리가 왜 비어 있어? 어디 갔나?"
"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불쾌한 아침이었다. 정체 모를 사고로 지하철이 잠시 15분 정도 정차했던 것을 제외하면 별 특별한 일도 없던 출근길이었다. 평일이 사흘이나 더 남은 화요일이라 그런지 유독 더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 엘리베이터 안의 아는 얼굴들에게 대강 손 인사를 건네고 6층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어제까지만 해도 업무와는 상관없는 잡다한 개인 물품으로 가득했던 옆자리 최정수의 책상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청소를 한 것이라기엔 차라리 다른 사람의 자리로 보일 정도로 별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는커녕 책꽂이 하나 없이 휑한 자리가 낯설어 반대편의 낯익은 검은 정수리에 말을 걸었다. 아침이라 잠긴 건지 감기 기운이 있어 쉰 건지, 평소답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드는 건 이번 달로 입사 1년 차가 되어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뗀 이정현 주임이다. 잇따른 야근의 스트레스로 피곤에 찌들어 있을 것이라고 얼추 짐작했던 이 주임은 어쩐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저…. 록수 씨."
"응."
"...괜찮으세요?"
뭐가? 되물었더니 어쩐지 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다. 눈을 돌려 정수 놈의 책상을 다시 가만히 살폈다. 의자의 방석도 없어졌고, 편의점 빵을 사 먹고 책상 한구석에 붙여두었던 스티커도 없다. 정장에 어울리지 않던 그 남색 배낭 역시 걸려 있지 않다. 허구한 날 뭐가 그리 좋은지 걸핏하면 회사에서 자고 가는 놈이 이 시간까지 출근을 안 했을 리는 없을 테고- 혹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건가. 정기 인사이동에서 채 3주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에? 하긴, 최정수라면 아예 없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다. 생명력이 천년 묵은 고목 뿌리만큼이나 질기기도 했고, 내심 윗분들도 그 써먹을 데 많은 능력을 탐내고들 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당일까지 본인도 그렇고 팀장 쪽에서도 아무 말이 없던 걸 보면- 또 같잖은 서프라이즈랍시고 이날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애도 아니고.
"아, 모르면 내가 팀장한테 물어볼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아, 아 그, 저기!"
팀장실 문이라도 두드려 보려 몸을 돌렸더니 웬걸, 곧바로 덥석 소매를 잡혔다. 눈치껏 이 주임을 놔주려던 나로서는 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내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툭툭 붙여오는 건 최정수나 팀장님 정도였고, 정수 놈 왈 아직까지 내 딱딱한 얼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고 했으니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뗀 입사 1년 차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도 뭣해 알아서 알 만한 사람에게 가보려던 건데.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덩치, 말투, 인상,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성질 더러운 놈으로 오인 받기 딱 좋은 조건이었으니. 사실 딱히 오해도 아니긴 했다.
"죄, 죄송한데 록수 씨…. 그... 제, 제가 한 팀장님 모시고 올 때까지만…!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한 팀장? 다른 팀 사람을 왜?"
"그게…."
말끝을 흐리며 눈을 슬그머니 피하는 게 왜인지 퍽 난감해 보이는 기색이다. 정수놈 책상 빈 게 왜 다른 팀 팀장을 불러올 일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관계가 아예 없는 문제도 아닌가? 최정수가 팀을 떠나 적을 옮기는 것이 이미 결정된 사안이고 그게 도시 중앙의 경비를 담당하는 한 팀장네 팀이라면, 말이 된다. 나라님들 계시는 곳을 지키는 거라면야 지금보다 생존율이 40%는 올라갈 텐데. 거의 승진에 가까운 인사라고 봐도 무방한 일이다. 갑작스러운 건 맞지만 최정수가 이때까지 따낸 공적을 생각하면 아예 말이 안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 좋은 일을 보고하는데 이렇게까지 우물쭈물할 일인가? 만일 이것도 순전히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탓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해한다. 아침마다 거울에 비치는 이 눈매가 얼마나 더러운지 내가 아는데. 금방 대답이 나오질 않아 긴장이 되는지 손가락을 꼼질대는 이 주임에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기다릴게."
"네! 금방 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까딱 고개를 숙인 이 주임이 총알같이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아니, 총알에 빗대기 조금 미안해질 정도의 속도였다. 비전투직이었던 것 같은데, 저렇게 발이 빨랐던가? 하긴 이런 세상인데 달리기 정도야 이미 기본 소양이 되었는지도 모르지. 이 주임이 빠져나가고 휑해진 사무실은 금방 조용해졌다. 마침 현장직들은 모두 자리에 없었고, 행정 처리 담당들도 어딜 간 건지 놓인 책상들만 해도 열두 개는 되는 공간이 어울리지 않게 한적했다. 평소에는 전화 너머로 오가는 고성으로 시끄럽거나 시시콜콜한 잡담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거나, 아니면 잔뜩 밀린 일을 급하게 처리하는 자판 소리로 가득하거나, 이 세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아서인지 고요한 아침 풍경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던 그 심상치 않은 몸놀림으로 보아 당장이라도 위층에 있을 한 팀장이 기세에 밀려 끌려 내려올 것 같아 팀장님을 찾아가기도 뭐해졌다. 일을 시작하기엔 나중에 타이밍이 애매해질 것 같아 괜스레 기지개나 한번 쭉 켰다. 어깨에 눌어붙은 찌뿌둥함이 좀 풀리는 것도 같았다. 문득 창밖으로 본 하늘은 웬일인지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푸르렀다. 서서히 여름의 절정으로 접어드는 티라도 내는 건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말간 태양 빛이 마지막 힘을 쏟아내는 것처럼 눈부시다. 6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의외로 손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 보였다. 꽃이 진 지 이미 오래된 나무들에는 녹색 잎이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게 열렸다. 유리 너머로도 찌르르 우는 매미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선선하고 맑은 가을이 머지않았다. 가을의 끝자락엔, 최정수의 생일이 있다. 녀석은 유독 제 생일날을 좋아했다. 이유인즉슨, 숫자상으로도 정확히 가을의 마지막 날이라 외우기도 쉽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게 아니더라도 내 생일과 같은 날이라 좋다고도 했다. 그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일까, 최정수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장 먼저 가을이 떠올랐다. 가을의 끝에 태어난, 가을을 닮은 인간. 녀석의 생일을 축하해준 지도 이제 6년째가 되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그래도 회사 내에 몇 있던 우리 또래의 사람 중에 최전방에 서고도 여전히 그 목이 붙어있는 건 최정수가 유일했다. 더러는 퇴사하고, 더러는 죽고. 나는 녀석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사했다. 나야 나설 일 없는 후방이니 그렇다 쳐도 생존율이 30% 미만이라는 최전방에 서고도 6년씩이나 살아남은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긴 했다. 녀석은 입사 첫날에 써 서랍 안에 넣어둔 유서를 입사 3년 차에 버렸고, 나 역시 4년 차가 되는 날 녀석의 사물함 예비 키를 돌려주었다. 나만큼 목숨줄 긴 사람 본 적 있냐는 으스댐에 팀장은 어쩌고, 라고 대꾸해줬더니 얼빠진 얼굴을 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팀장? 진짜 없어요?"
똑똑.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답이 없어 그냥 손잡이를 벌컥 돌렸다. 철컥. 잠금쇠에 걸려 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잠가놓은 건가? 의아한 일이었다.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보안에 있어선 안전 불감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슨하게 굴었는데. 그래도 없는 사람 사무실 문을 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몇 번 소득 없이 문고리를 찰칵찰칵 돌려본 뒤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당최 다들 어딜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무실을 통째로 옮겼다기엔 이 주임은 멀쩡히 출근해 있었고, 혹시.
“퇴사했나?”
감히 날 두고?
“...어?”
팅. 급작스럽게 치솟은 분노로 머리에 열이 오르기 직전 묘한 금속음이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무언가가 책상 가 쪽에 놓여 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팔에 맞은 것 같았다. 집어 들고 보니 길고 굵은 손가락과 대비되어 유난히도 얇아 보이는 은빛 반지다. 역시나 아는 물건이었다. 아마도 칠칠치 못한 최정수가 무심결에 흘리고 간 걸 내가 주워다 놨을, 1년 전 녀석과 내가 같이 맞춘 반지. 외형은 정수놈 것과 내 것, 둘 다 똑같이 생겼지만 자세히 안쪽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새겨진 철자가 달랐다. 각자의 이니셜을 상대의 반지에 새겨넣은, 남에게 보여주기엔 다소 낯부끄러운 감이 있는 커플링이었으니까. 사실 반지를 볼 때마다 낯 붉히는 게 싫어 생일로 대신하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우리 둘 다 생일이 같았으니, 별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직하게 한글로 세글자를 떡하니 박아넣기엔 녀석도 나도 이미 서른이 가까운 어른이었고. 그 와중에 중복되는 글자가 있어 더 커플 같아 좋다는 최정수의 주책에 반지를 끼는 게 더 부끄러워졌지만, 어쨌든, 애초에 우리 둘 다 평소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상관은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지로 뛰어들어 옷이며 살이며 찢어먹고 오는 처지에 미쳤다고 이, 탁 치면 똑 하고 끊어질 것 같은 물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반지를 실물로 보는 것도 또 오랜만이었다. 내 것이야 집에 잘 놓여 있겠지만 애초에 집에 재깍재깍 들어가는 것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였으니. 그마저도 늦은 시간에 거의 기어서 들어가는 수준이었으니까 당연히, 그대로 침대 위로 엎어져 자기 바빴다. 그러니 반지 케이스를 열어 그 안의 물건을 눈에 담아본 것이 몹시 오래전이라, 기분이 굉장히 새삼스러웠다. 슬쩍 손에 들린 반지를 기울여 글자를 확인해보았다. RS. 역시 최정수의 반지였다. 잘 들고 다니지야 않는다지만 사물함 안에 언제나 신줏단지 모셔놓듯 반지를 놔두던 녀석이 웬일로 이런 걸 흘리고 다녔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주인에게 돌려주기 전까지 아주 조금, 이 감상적인 기분에 잠겨있는 것도 낯간지럽지만 그래도 괜찮겠다 싶었다. 윤이 나는 반지를 그나마 상처가 적은 왼손 손가락에 끼워 넣어보았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튀어나왔다.
“진짜 안 어울리네.”
못난 손에 끼우기에는 지나치게 앙증맞고 예쁘게 생긴 물건이었다. 일부러 장식 같은 것을 달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동안 관리를 잘했는지 반짝반짝 광이 나는 반지를 보고 있으니 어째 가슴께가 묘하게, 그랬다. 손가락에서 반지를 다시 빼내었다. 형광등 불빛을 받고 반지 안쪽의 글자가 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겠지만.
“...내일은 나도 끼고 올까.”
저가 흘리고 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최정수의 얼굴이 당황과 안도감으로 못생겨지는 꼴이 갑자기 무척 보고 싶어졌다.
“...왜 웃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그곳엔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던 이 주임과 한 팀장이 서 있었다. 데리고 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확실히 그렇게 호언장담할 만했다.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빨리 불러오다니. 어쩐지 경직되어 보이는 한 팀장의 얼굴이 조금 의아했다. 일단 주먹을 쥐어 반지를 가리고, 말을 걸어온 한 팀장에게 답을 했다.
“아,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혹시 저희 팀 사람들 어디 있는지 아세요? 다들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심지어 최정수 자리는 아예 짐도 다 빠졌네요. 저한테 연락 온 것도 없었... 한 팀장님? 무슨 일 있습니까?”
주절주절 상황 설명을 하고 있으니 어째 한 팀장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그러고는 흘끗흘끗 이 주임 쪽을 바라보는데, 이 주임은 또 그런 한 팀장에게 무언갈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부탁하는 것 같기도 한 눈으로 우물쭈물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한 팀장이 아닌, 내 쪽으로. 그 심상찮아 보이는 얼굴에 말을 멈춰도 한 팀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사무실 안을 훑고, 나를 보고, 또다시 주변을 돌아보길 반복할 뿐. 그러기를 한참, 이윽고 한 팀장의 입이 열렸다. 하.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이 설명이나 변명이 아닌 한숨이라는 점이 어째 조금 불안하긴 했다.
“록수 씨.”
한 팀장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선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움찔한 내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저를 마주하자 한 팀장의 낯빛이 더욱 굳어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꾹 밀어 넣고 있는 얼굴이었다. 불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인 것도 같았다. 이상한 건 그 눈이, 그녀가 내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이었다는 것이다. 안타까워하는, 아니, 안쓰러워하는. 아니.
“그러니까 내가 안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무척이나 불쌍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낯선 눈으로.
“...김 팀장.”
그렇게, 오늘따라 괜히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자기 손으로 직접 치운, 죽은 사람들 자리 붙들고 뭐 하는 거야?”
그러자,
분명 손에 꼭 쥐고 있었을 텐데.
반지가 쨍,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귀를 때렸다.
눈이 부셔 잠에서 깨어났다. 천장에서 지나칠 정도로 불빛이 쏟아졌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눈 위로 끼얹어 내리는 폭력에 가까운 빛을 손등으로 가렸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스쳐 지나가며 반짝, 빛났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왼손을 내려다보자 못난 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얇은 은색 반지가 보였다. 안쪽에는 분명 내가 잘 아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하.”
눈을 감았다. 지나간 순간들을 모두 기억하고 기록해내는 나의 눈이 여태껏 미운 적은 없었다. 나를 살리는 힘, 원천, 수단. 남들에게는 기억조차 되지 못했을 사소한 것들마저 모두 이 눈에 담아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나는 단순히 성가신 두통으로밖에 여겨본 적이 없었다. 나는 반지의 작은 흠집마저 모두 기록했다.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흔적들, 설사 보았더라도 너무나 작아서 인상에조차 남지 못할 상처들까지 전부. 나는 모든 것들을 기억했다. 그러니 나는 알았다. 이 작은 반지가, 내 것이라는 것마저도. 어째서 그 예쁜 물건이, 너의 것이, 내 손 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업자를 불러와 사물함의 잠금장치를 뜯어냈던 것이 기억났다. 그 안에서 너의 반지를 발견했던 것도. 조문객이 떠난 빈 장례식장 화장실에서 반지를 물에 씻었던 것도. 그것을, 네가 가는 길에 함께 태워 보냈던 것도. 전부, 다. 꿈에서 깨어나자 허무할 정도로 모든 것을 알았다. 기억이라면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이라면-
“...이따위 것.”
문득 이것을 집어 던지고 싶어졌다. 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힘껏, 멀리.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기록할 수 없으니 되짚을 수 없을 테고 기억할 수 없으니, 추억할 수도 없을 테다. 죽음을 추억하는 미래의 나 따위, 없어질 테니. 사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끔찍했던 사실이 있었다. 나를 연민하던 그 표정을 그 순간, 너무도 절실하게 이해해버린, 일이.
빛나는 은빛을 보며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던 그 감각이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어찌나, 축복처럼 느껴지는지-
숨을 들이켰다. 숨이 쉬어졌다. 목을 잡았다. 가볍게 쥐어봐도 되려 목 안을 스며드는 호흡이 뚜렷해졌다. 잠시, 어디까지 세게 움켜쥐면 더 이상 이곳을 드나들 수 없을 것인가, 생각했다. 제법 간절한 생각이었다. 죽은 너를 잠시 잊어버린 허망한 기적 속에서 이 손에 남은 너의 마지막 흔적을 보며 웃었던 멍청한 순간들이 부럽고 부럽고도 부러워서, 부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목을 더듬으며, 살갗에 와닿는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뜨거워지는 눈을 감으며,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꿈일 거면 차라리.”
외칠 수밖에 없었다.
“영영 깨지 말 것이지.”
그래, 차라리.
영영 그대로 무지에 파묻혀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