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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시, 논커플링(약 팀장록수), 리엘님

@R_bermuda

한 시가 훌쩍 넘은 늦은 새벽, 아파트 주차장에 조용히 멈춰선 검은 차량이 한 대 있었다. 좁은 틈에 능숙하게 주차를 하고 모습을 드러낸 제법 키가 큰 인영은 조심스레 차 사이에서 빠져나와 가로등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곤해 보이는 낯으로 이마를 덮는 검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하품을 하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김록수였다.

슬슬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며 추워지는 날씨에 록수는 겉옷을 입지 않아 얇은 셔츠만 한 장 걸친 팔을 두어 번 문질렀다. 본래대로라면 진작에 집으로 돌아와 자고 있거나, 회사나 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으나 록수는 오늘따라 팀장의 부탁으로 타지에 외근을 다녀오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고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대체로 현장에서 뛰는 일에 비하면-매번 현장으로 뛰쳐나가는 록수는 사실 후방 지원부 소속이었지만-별 것 아닌 일들이곤 했다. 그럼에도 본인이 지닌 능력 자체가 흔한 것이 아니었기에 록수는 꼬박꼬박 군말 없이 일을 다녀오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뻑뻑한 눈을 손등으로 연신 비벼대던 록수는 보고를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엄지로 익숙한 단축번호를 꾹, 누르려던 록수는 순간 눈에 닿은 시간에 1번을 향하던 손가락을 멈춰 세웠다. 지금은 여느 사람들이라면 보통 잠들어 있을 새벽 시간대였다. 팀장이 며칠 전부터 밤을 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지금쯤 업무를 마치고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같이 사무실에 있었던 것이 아니니 혹시 자고 있기라도 한다면 간만의 잠을 방해하는 꼴이 될 터였기에 록수는 곧바로 뒤로 가기를 누르고 대신 메신저 창에 들어갔다. 그러면 오늘 일하던 사이 몇 개 도착해 있던 메시지들이 맨 위칸부터 주루룩 떠올랐다.

[ 록수야, 먹는 게 힘이다. 알지? 밥 안 챙겨주면 얘기해라~ - 팀장 ]

[ 보고싶다, 친구야... 너 없으니까 팀장님이 날 두 배로 굴리는 거 있지. ㅜㅜ ] [ 그런 의미로 내일 저녁에 오랜만에 소주 콜? - 정수 ]

사소한 문자 하나에서도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특히 정수의 메시지 끝에 붙은 한쪽 눈을 찡긋, 감는 이모티콘에 록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답신을 하나 작성했다.

[ 팀장, 일 끝내고 왔습니다. 보고서는 내일 출근 때 제출하겠습니다. ]

동료들이야 당장 몇 시간 후에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면 될 터였으니 일단은 일 보고가 우선이었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타자를 두드린 록수는 동그란 로딩 바가 모두 차오르고, 문자가 보내졌다는 체크 표시가 뜬 후에서야 핸드폰을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이내 주머니에서 다시 빠져나온 잔 흉터가 많은 손끝에 걸려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담배였다. 담뱃갑의 뚜껑을 열기 위해 시선을 밑으로 내리던 록수는 문득 눈에 들어온 무언가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인도 옆 바닥의 구석진 곳, 그곳에는 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밤이면 꽤 거세지는 찬 바람에도 서로 딱 달라붙어 옹기종기 피어난 자그마한 꽃송이를 발견한 록수는 손을 뻗어 조심스레 꽃잎을 툭 건드려보았다. 그러면 흔들리는 붉은빛의 꽃잎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아저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아니, 어제 만난. 부모와 떨어져 길을 잃은 듯하기에 도와줬던 아이 한 명과 관련된 기억이었다. 길을 잃었냐는 질문에 또랑또랑하게 그렇다 대답한 아이는 친절하게도 카드지갑에서 부모님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 건네주었었다. 그에 록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자 같이 히, 웃던 아이의 토끼 같은 앞니가 떠올라 록수는 지금 또 한 번 작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건네준 록수가 부모에게 전화를 거는 사이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물고 지금의 록수처럼 저 한쪽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심심해서 그런가, 싶은 마음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록수는 부모와의 연락이 끝난 후 아이의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아이는 옆을 휙 돌아보며 눈을 반짝이나 싶더니 이내 꼬물꼬물 움직이던 손을 불쑥 내밀어 무언갈 건네왔다.

“이거, 선물이에요.”

아이가 건네온 것은 근처에 피어 있던 작은 꽃송이였다. 단풍만큼이나 고운 붉은빛을 머금은 그 꽃을 건네받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록수는 옅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고맙다. 예쁜 꽃이네.”

잔뜩 흉터가 진 손과는 어울리지 않을 그 고운 꽃송이를 어색하게 쥐고 빙글 돌리던 록수는 이내 뒤편을 향해 턱짓하며 제법 다정히 말을 건넸다.

“이제 부모님한테 가봐야지?”

저 뒤쪽에서 한 쌍의 부부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길에 그렇게 우연히 한 아이와 만나게 되었던 록수는 무사히 아이의 부모를 찾아준 후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감사 인사와 함께 배꼽 인사를 꾸벅, 하며 배시시 웃던 아이는 록수가 꽃을 쥐지 않은 손을 흔들며 인사해줄 때마다 연신 부모님과 맞잡은 양손을 신나게 흔들어댔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이 지난 자리엔 꽃이 남았다. 마치 록수가 마주한 지금 이 상황처럼.

저답지 않았던 상념에서 벗어난 록수는 이내 읏차, 무릎을 짚고 일어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일 때마다 다리 옆에서 검은 봉지가 부스럭거리며 흔들렸다. 뭐가 들어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어볼 때 유리병인 듯 보였다. 그 봉지를 벤치 위에 내려놓은 록수는 곧이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어 물고 있던 담배의 흰 끝자락에 불을 붙였다. 숨을 빨아들일 때마다 새하얗던 종이가 빠른 속도로 검붉은 불길에 집어 삼켜졌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입안에 머금은 연기를 내뱉자 어둠이 내린 하늘 위로 연회색의 먹구름이 바람을 타고 올라가다 서서히 흩어졌다.

이리 자연스레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사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은 록수였다. 그럼에도 제법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시간은 일 년쯤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졌다. 록수는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담배를 피울 잠깐의 여유조차 없었다 해야 맞을 터였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온 바로 첫날부터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말뿐만이 아닌 이리저리 구르는 생활을 지내게 된 록수는 자연스레 담배에 손을 대게 되었다. 물론 자주 피우는 것은 아니었고, 아주 가끔의 일이었다. 몸에 안 좋다고, 너까지 시작하면 어쩌냐면서 팀장이 종종 장난스레 타박한 것도 있었지만 록수도 건강을 해칠 정도로 피울 생각은 없었던 것이 컸다. 록수는 매번 저에게 걱정을 내뱉다가도 종종 제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일 때면 마지막 담배 한 개비도 슬쩍 양보해주곤 하던 팀장과 정수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저희들만의 배려 방법이었다.

끝없는 상념 속에서 빠져나온 록수는 바람을 타고 점점 올라가는 회색빛 연기를 좇아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보이는 것은 어둑한 하늘이었다. 오늘따라 하늘 위로 유난히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앉은 허연 구름이 꾸물꾸물 몸을 움직이는 모양새를 지켜보고 있자면 한참 뒤에 그 옆으로 달이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가을 장마의 끝물에 드디어 얼굴을 내비춘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환한 빛을 품은 보름달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보름달. 그 달은 록수의 인생에 있어 여러 순간을 기억나게 하는 달이었다. 록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그 어느 날들에 시야 한가득 보름달을 담은 채 스르륵 눈을 감아 내렸다. 하늘보다도 더 새카만 어둠을 담은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몸을 숨기면 록수는 서서히 과거 속에 잠겨 들어갔다.

첫 번째로 떠오른 기억은 열 살은 됐었나 싶은 어린 시절이었다. 혼자였던 적이 없던 록수의 세계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두 사람이 사라진 날. 바로 그날부터 록수의 기나긴 악몽은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웠던 교통사고와 그보다도 더 갑작스러웠던 상실. 그 급박했던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의 보호로 간신히 사고 이후에도 홀로 차 밖으로 내보내졌던 록수는 그저 멍하니 도로 위에 누워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곳저곳을 다쳐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그저 홀린 듯이 하늘을 쳐다보면 그날도 오늘처럼 보름달이 유독 환하게 떠 있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상황에 어렸던 록수는 그 상황이 그저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아침마다 저를 깨워주던 부모님의 다정한 얼굴이 아닌 병원 천장이었고, 또한 현실이었다. 이름 하나, 얼굴 하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록수는 그 누구도 먼저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이제 제게 돌아갈 안식처는, 따스한 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흔한 친척조차 하나 없던 록수에게 이제 돌아갈 곳은 집이 아닌 고아원이 되어 있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낯선 분위기. 그것이 바로 록수가 몸이 낫자마자 가야 했던, 그리고 이제 익숙해져야 할 장소였다. 하지만 고아원에 집에서처럼 사생활이 지켜지는 각자의 방 같은 것은 존재할 리 없었기에 또래 아이들과 따닥따닥 붙어 누워 내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록수는 고아원에 갔던 첫날부터 악몽을 꾸게 되었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똑같았다. 사고가 있던 날 밤의 일들이 테이프를 감듯이 느리게 펼쳐지고 나면 달이, 바로 그 보름달이 저를 짓누를 듯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숨이 막히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깨어나곤 하던 그 꿈을 꾼 이후로 이전까지는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지던 달은 록수에게 껄끄러운 대상이 되어 있었다.

또한 악몽에서 깨어나면 참 묘하게도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언제나 한결같이 새벽 두 시였다. 그때부터 록수에게 새벽 두 시는 슬프고도 외로운, 사무치게 고독한 시간이 되었다.

길었던 악몽이 서서히 잊혀갈 때쯤 또 다른 악몽이 록수의 삶을 뒤덮었다. 이번엔 비단 록수 혼자만의 악몽이 아닌 격변을 맞이한 그 모든 인류의 악몽이었다. 누군가에겐 평화로웠고, 누군가에겐 고되었던 불공평한 세상은 그전까진 나름대로 겉보기엔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록수의 나이가 19살에서 20살로 막 넘어가던, 전년도보다 더한 추위가 예고된 1월 초의 어느 날. 세상에 격변이 찾아왔다.

이때 록수가 살아남았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그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괴물들에게서 살아남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록수에게 있어 그 모든 것은 전부 우연일 뿐이었다. 그저 건물이 붕괴될 때 잔해가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을 뿐이었고, 가까스로 잔해를 피해 대피하려던 사람들에게 괴물들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을 땐 단지 무너져내린 콘크리트 벽의 잔해들이 주변을 막고 있어 그들과 차단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구하러 찾아오는 이가 하나 없어 이 안에 영원히 갇힌 채 굶어 죽거나, 혹은 서로 아슬하게 겹쳐져 있는 잔해가 언제 무너져내려 그 밑에 깔려 죽을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록수는 최대한 침착하게 계산을 해보았다. 언젠가 TV에서 흘러나왔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한 자 한 자 새겨지듯 선명히 떠올랐다. 공기 없이는 3분, 물 없이는 3일, 음식 없이는 3주. 그리고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마침 고립되었던 첫날 밤부터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비에 록수는 급히 입을 벌리고 허겁지겁 비를 받아 마셨다.

해가 지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록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가? 사람들의, 혹은 괴물들의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오던 몇 시간 전과는 달리 지금은 주변이 거의 고요에 가까웠다. 고요는 결코 긍정적인 것만을 상징하진 않았다. 죽음과 멸망, 그 끝에도 언제나 고요가 존재했으니까.

그럼에도 록수는 살아야 했다. 살고 싶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부모님에게서 꼭 살아남으라는 말을 들었던 김록수는 누군가에게 이끌리듯 그 비를 받아마시고, 비를 피해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체온을 유지했다. 고개를 돌리면 어둠 속에서도 엉망이 된 건물 내부의 모습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영화, 혹은 소설 속에서나 마주하던 시체들의 모습에서는 현실감이 없으면서도 끔찍하리만치 현실감이 느껴지는 모순감이 느껴졌다. 코끝을 맴도는 피비린내와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지 꼬박 이틀 가까이 시간이 지났을 때부터는 빗소리를 제외한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록수는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이제 이곳에 홀로 남았구나.

근처를 굴러다니는 반쯤 망가진 라디오에서는 지직거리며 간혹가다 방송이 뚝뚝 끊기듯 흘러나왔다. [ 지직-, 현재 시각을 알려드립니다. 지직-, 두 시, 지직-, …은 음악-. ] 록수는 그 잡음을 굳이 끌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마저도 없다면 저까지 저 바깥의 적막에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그래서 록수는 유일한 목소리에 필사적으로 시선을 붙였다. 멍하니 웅크려있기만 한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하늘을 가린 건물의 잔해 사이로 난 좁은 틈을 올려다보면 그 틈새로 달빛이 눈을 찌르듯 내려왔다. 그것은 록수에게 있어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자, 의미 없는 허상이었다. 차라리 이곳이 어딘가의 망망대해 위라면 달빛과 북극성의 환한 빛을 쫓아 이동하기라도 할 수 있을 터였으나 이곳에선 그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적어도 록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록수의 시야엔 그림자 하나가 달빛을 지우며 드리워졌다. 어둠보다 새카만 눈동자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록수는 이때 팀장, 이수혁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땐 팀장이 아니었지만 그때의 그 기억은 록수에게 있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시간 중 하나였다.

“...거기 밑에, 내 목소리 들리나?”

손바닥 반 정도는 되나 싶던 그 구멍으로 금동앗줄마냥 내려오는 목소리에 록수는 눈을 깜빡였다. 여상스러운 투로 말을 걸어왔던 그는, 이수혁은. 그것이 아주 쉬운 일이라는 양 손을 뻗어 악몽 속에서 저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가도 그만큼이나 우연히 록수의 인생에 다시 나타나 오래도록 함께하게 되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질긴 인연이었다.

그다음은 이전처럼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새벽에 갑작스레 벌어진 전투를 끝내고 여기저기 다치고 굴러 먼지투성이가 된 채 동료들과 바닥에 대자로 누워 올려다본 하늘엔 유난히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 위로 또 보름달이 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먼저 달 이야기를 꺼낸 것은 록수가 아닌 동료들이었다.

“오늘따라 달이 밝은 것 같지 않냐?”

“그러게나 말이다~ 그런데 달 옆에 저거 그 별자리 같은데. 카시...카시...”

“카시오페이아?”

“그래 그거! 캬~ 내가 고등학생 때 배운 걸 아직도 안 잊고 있다니까?”

“어이구, 잘나셨어요~”

투닥거리다가도 금방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떠돌았다. 시덥잖은 대화 하나에도 이유 없이 즐거워지던 때였다. 록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동료가 생겼다는 그 충족감에 록수는 웃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순간이 십몇 년에 걸친 길고 길었던 기억의 끝이었다. 록수는 악몽의 끝에서 눈을 뜨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새 장초가 불에 야금야금 집어 삼켜져 곧 손을 데이기 직전인 모습에 허둥지둥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록수는 어이없는 제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집에 가야지, 이제.”

손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추위도, 외로움도.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스스로 온몸을 동여매고 감싸 안아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뼈에 사무치도록 만드는 것은 그 두 개의 공통점이었으나 록수는 지금 이순간 추위 속에 홀로 서 있긴 했어도 이전처럼 외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제 록수에게도 돌아갈 곳이,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저를 기다려줄 동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록수에겐 더 이상 이 추위가 전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제법 따스하게 느껴지는 달빛을 뒤로하고 록수는 가볍게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 *

 

- 삑, 삐빅, 삑. 띠로롱-.

현관키를 올려 비밀번호를 누른 록수는 익숙하게 신발을 벗으려 몸을 숙이다 멈칫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문을 여는 순간 켜져야 할 현관등이 영 묵묵부답이었다.

‘...간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손을 높이 들어 허공에 휘적여도 도통 불이 들어올 생각을 않는 현관등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록수는 속으로 날짜를 셈해보며 신발을 벗었다. 툭툭 벗은 단화를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걸음을 옮겨 거실 벽을 두어 번 정도 더듬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손끝에 스위치가 걸려왔다. 손끝에 힘을 줘 탁, 거실 불을 켜니 순간 확 밝아지는 시야에 눈을 반쯤 내리감고 있던 록수는 앞에서 들려온 펑!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청이 제법 얼얼한 소리가 들리고 나면 머리 위로, 얼굴 앞으로 형형색색의 잘게 잘린 종이 쪼가리들이 내려앉았다. 도통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에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록수는 또 한 번 눈앞에서 터지는 폭죽에 깜짝 놀라 평소의 무표정을 잃고 입을 헤벌리며 눈을 꿈뻑였다.

“푸하하! 거봐, 내가 놀란다 했지?”

“임마,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냐? 쟤가 현장 뛰는 놈이었으면 넌 이미 여기 없어~”

그 표정을 보고는 언제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냐는 것처럼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잡담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익숙한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분명 제 기억이 멀쩡한 게 맞다면 이 시간에 동료들에게 집으로 오라 먼저 연락한 적도 없었고, 역으로 동료들이 오겠다 연락한 적도 없었다. 메신저에 별다른 연락이 없었던 것과 지금 신나게 웃어제끼는 저 표정들을 보면 분명 무슨 일이 벌어져 단체로 집에 쳐들어와 있는 것도 아닐 터였기에 록수는 무슨 일로 왔냐는 의미를 담아 주변을 뚱하니 둘러봤다. 그러면 하나둘씩 웃음을 멈춘 동료들은 뒤를 힐끔 돌아보며 슬그머니 자리를 비키기 시작했다. 무슨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대체 뭔데? 저 뒤에서부터 제 앞까지 쫙 갈라진 길에 팔짱을 끼고 왜, 하는 질문을 던지려던 록수는 어쩐지 혼자 안 보인다 싶더라니 길이 터진 부엌 쪽에서 걸어 나오는 팀장의 모습에 다시 한번 눈을 꿈뻑여야 했다. 팀장은 그냥 나오는 것도 아니고 손에 초가 꽂혀 있는 케이크를 들고 있는 채였다. 그것도 제 나이대로 큰 초가 두 개, 작은 초가 다섯 개 꽂혀 있는 케이크를.

“짜식... 김록수, 생일 축하한다!”

호쾌하게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는 팀장에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록수는 제 머리에 푹 씌워지는 뭔가에 손을 올려 머리 위를 더듬었다. 거울로 본 것은 아니었으나 머리에 씌워져 있는 뾰족하면서도 둥근 모자는 분명 생일 파티 때나 쓸 법한 고깔 모자였다. 그를 깨닫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록수는 저에게 모자를 씌워준 정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림처럼 되물었다.

“... ...생일?”

록수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워지는 기분에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일을 챙기지 않은 지가 십몇 년도 더 된 일이었기에 그러했다. 고아원에 들어가기 전의, 그러니까 교통사고가 나기 전 부모님과 함께 소박하게 열었던 생일 파티가 록수의 생일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이후로는 바쁘게 살아가느라, 일하느라 제 생일을 잊고 살았던 록수의 표정을 보던 정수는 허이구, 하는 표정을 짓곤 헤드락에 가까운 어깨동무를 걸어왔다.

“너랑 나랑 생일 똑같잖냐! 이 형님이 딱 기억하고 있었지.”

“동갑에 생일도 같은데 왜 형님이냐?”

“난 새벽에 태어났다니까? 몇 시간 형님도 형님이지!”

뻔뻔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바라보는 정수에 록수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힐끔거리다 말을 하나 툭 던졌다.

“난 자정 넘자마자 태어났는데.”

오늘따라 장난기를 가득 품고 올라간 입꼬리를 미처 보지 못했는지 특유의 얼빵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정수는 갑자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록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왔다.

“록수야, 요즘 세상엔 원래 위아래로 서너 살까진 다 친구라잖냐?”

“어쭈? 이 꼬맹이들이, 내 앞에서 나이 얘기를 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팔을 쭉 뻗어 케이크를 더 가까이 내밀어왔다.

“잡담은 이따 하고 초나 불어라! 촛농 케이크가 먹고 싶은 거라면 말리진 않겠다만.”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린 팀장이 턱짓한 끝에는 촛농이 느리게 떨어지고 있는 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싼 동료들은 각자 정수와 록수의 어깨를 잡고 빼꼼 고개를 내밀며 둘을 재촉해댔다.

“야, 야. 촛농 떨어지려 그런다!”

“불기 전에 소원도 하나씩 빌어라~”

생일인 당사자들보다 자기들이 더 신난듯한 분위기에 정수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인 록수는 이내 작게 일렁이는 촛불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하는 평화롭고 따뜻한 불빛이었다. 록수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한 명이 눈치 좋게 후다닥 불을 끄고 오자 다들 하나둘 숫자를 세고 박수를 치며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각자 박자도 다 달랐고, 중간에 슬쩍 삑사리를 낸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엉망진창인 분위기가 바로 즐거움의 근원이었다.

록수는 옆에서 같이 은근슬쩍 노래를 따라부르다 박자를 놓쳐놓고는 아닌 척 뻔뻔한 표정을 짓는 정수를 보곤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걸며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에 킥킥대며 어깨를 으쓱이던 정수는 슬슬 노래가 끝나가자 역으로 록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고 초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는 냉큼 먼저 눈을 감고 제법 진지하게 손까지 모아 소원을 비는 정수의 모습을 응시하던 록수는 곧 그와 마찬가지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꾹 감아 내렸다. 소원을 빌면 들어줄 누군가가 있을 거란 믿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는 나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참과도 같이 느껴진 찰나 동안 속으로 무언갈 중얼거리며 소원을 빈 록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저를 기다리던 정수와 함께 초를 후, 불었다. 촛불이 모두 꺼지고 거실이 다시 환해지면 이제 파티의 시작이었다.

불이 켜지길 기다렸던 것마냥 다들 하나같이 왁자지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팔짱을 턱 끼고 지켜보던 록수는 거실 한가운데에 말을 툭 내뱉었다.

“여기가 너네 집이냐?”

“우리 사이에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아주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찬장을 열고 그릇을 꺼내다 장난스레 어깨를 툭 쳐오는 동료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록수는 누가 제 팔에 여즉 걸려 있던 비닐봉지를 쑥 빼가자 어어, 하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설마 우리를 버리고 치사하게 혼자 술 마시려 했냐?”

“의리가 없네 김록수~ 이거이거 우리 안 왔으면 혼술할뻔 했는데?”

옆에서 틱틱대며 아쉬운 어투로 삐죽대는 동료들에 록수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시간에 부르면 누가 오냐?”

“안 오긴 왜 안 와? 자다가도 깨서 달려오지~”

“선배! 저도 잊으시면 안 돼요?”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록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이 시간은, 밤은 언제나 록수에게 있어 외롭고 고독하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새벽에 깨어나면 연락을 할 사람이 있었고, 찾아와줄 사람 또한 존재했다. 아주 오랜만에, 록수는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외로움은 이제 록수의 삶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괜스레 간지러워진 록수는 얼굴에 붙은 종잇조각을 떼는 척하며 슬그머니 손 뒤로 웃음을 숨겨냈다.

“형~ 저희 내일 단체로 휴가 내면 안 돼요?”

“휴가 말고 해고는 가능할 것 같다, 정수야.”

“아닙니다! 사실 전 회사가 제 집 같습니다, 팀장님.”

“으이구, 여름 휴가까지만 좀 더 참아.”

말 그대로 일상적임 그 자체였다. 세계는 오히려 예전보다 몇 배는 더 번잡함에도 록수는 지금 이순간이 그때보다 한참 더 편안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물론 분위기만이 다르게 느껴진 것은 또 아니었다. 이 집은 분명 그리 넓진 않은, 아니, 오히려 좁은 것에 가까운 장소였으나 록수에겐 항상 이 집이 한없이 텅 비게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언제나 적막에 가득 차 있던 집은 오늘따라 바글바글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파묻혀 아주 꽉 차게 느껴졌다. 마치 그 옛날, 부모님과 살던 어린 시절의 포근했던 추억이 떠오르는 분위기에 록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해 일할 때도 홀로 있을 때가 많던 록수였지만 그 어느 순간부턴가 동료들과 함께하는 이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록수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모든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기록했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이끌어 낸 능력이었다. 평소 능력을 사용할 때와는 달리 록수의 눈빛은 모두가 만들어낸 이 분위기만큼이나 다정했다.

“자자, 다들 잔 들었지?”

소주잔을 젓가락으로 팅 두드린 팀장은 이목을 모은 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사는 게!”

“최고다~”

팀장의 18번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 다들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부딪쳤다. 록수는 한 잔을 마시자마자 바로 정수와 또 한 잔을 나누고 어깨를 툭 맞댔다. 잔에서 넘쳐 손에 묻은 술을 가볍게 털어내며 주변을 쓱 둘러보다 눈이 마주친 팀장은 입 모양으로 말을 걸어왔다. 선물은, 이따가. 그리 말하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팀장에 록수는 마찬가지로 엄지를 척 들어 올리곤 입 모양으로 감사를 전했다. 가슴 한켠을 누가 보드라운 깃털로 살살 간지럽히는 것도, 손을 불쑥 집어넣어 심장을 꽉 쥐고 지나간 것도 같았다. 괜스레 뜨끈해지는 눈시울에 록수는 부러 술을 몇 잔이고 들이키며 이 뜨거움을 술기운 탓으로 미뤄두었다. 술기운에, 능력 때문에. 그러니까 록수는 오늘따라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 위에 새로운 추억들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 올렸다.

팔로 바닥을 짚어 상체를 젖히며 바라본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새벽 두 시는 더이상 록수에게 있어 외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시간이 된 그 시간에 록수는 이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었고, 그렇길 바랐다.

록수는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깨어나게 되더라도 더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되기를. 그런 소원을 빌며 눈을 감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달빛이 창밖에서 들어오던 날, 새벽 두 시의 일이었다.

오전창   오전오후창

첫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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